‘33인’ 이종일 선생 영양실조로 별세… 제국신문 등 이끌며 항일운동[송종훈의 백년前 이번週]

2025. 9. 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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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9월 1일 동아, 조선일보에는 한 인물의 장서(長逝·죽음) 소식이 실린다.

"기미년 3·1운동의 선두에 있던 48명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 씨는 파란중첩(波瀾重疊·변화와 난관이 많음)하던 68세를 일기로 8월 31일 0시에 경성 죽첨정 1정목 3번지 자택에서 영양 불량이란 병(病)으로 영원의 길을 떠났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그가 기미년 사건으로 철창 생활을 할 때 죽어버리고 지금은 아들도 손자도 없이 그 부인 이 씨와 죽첨정 오막살이 집에서 삼순구식(三旬九食·30일에 아홉 끼니를 먹는다. 몹시 가난함)으로 그렁저렁 지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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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훈의 백년前 이번週

1925년 9월 1일 동아, 조선일보에는 한 인물의 장서(長逝·죽음) 소식이 실린다. 그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이종일(李鍾一) 선생이다. 비가 새는 셋집에서 자식도 하나 없이 영양 부족으로 쓰러져간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미년 3·1운동의 선두에 있던 48명 중의 한 사람인 이종일 씨는 파란중첩(波瀾重疊·변화와 난관이 많음)하던 68세를 일기로 8월 31일 0시에 경성 죽첨정 1정목 3번지 자택에서 영양 불량이란 병(病)으로 영원의 길을 떠났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그가 기미년 사건으로 철창 생활을 할 때 죽어버리고 지금은 아들도 손자도 없이 그 부인 이 씨와 죽첨정 오막살이 집에서 삼순구식(三旬九食·30일에 아홉 끼니를 먹는다. 몹시 가난함)으로 그렁저렁 지냈다더라.”

이야기는 계속된다. “고 이종일 씨는 갑오정변 이후에 관직을 사직하고 조선 민족의 미개(未開)를 탄(嘆)하여 우리 글의 신문으로 조선에서 효시(嚆矢)인 제국신문 사장으로 취임한 후 10여 년간 심혈을 기울여 경영하며 인민(人民) 개발에 전력했다. 그의 직필(直筆·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음)은 드디어 당시 당국자에게 미움을 사게 되어 누차 감금까지 당한 일이 있다 하며 이후 한성부민회장, 자강회, 대한협회 등 주간(主幹)을 역임하고 항상 조선 국문의 불완전을 느껴 국문연구회를 만들어 스스로 그 회장에 취임하여 노력하였다. 시세(時勢)가 급전(急轉)하여 한일합방이 된 후에는 경향(京鄕)을 통하여 7개 학교 교장을 역임하다가 3·1운동 전에는 천도교 월보 사장, 보성사 사장 등으로 재임하였다. 기미 선언 시 33인 중 한 명으로 서명하였을 뿐 아니라 자신이 신임하는 직공 몇 사람을 데리고 독립선언서 수만 장을 인쇄한 일이 있다. 이 사건으로 피착(被捉)되어 약 3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철창 생활을 하였다더라. 슬하에 일점혈육이 없어 상가에는 오직 미망인 한 사람이 슬피 울고 친지가 모여 고인을 애도하며 다 쓰러지고 비가 새는 셋집 마루에서는 향연(香煙)이 처량하게 오른다.”

이종일 선생의 별세에 대하여 그의 친척 이종린 씨는 이렇게 말했다. “별안간 이런 일을 당하여서 할 말이 없습니다. 이종일 씨는 성질이 매우 온후하고 침묵하며 질소(質素·소박)한 어른입니다. 조선 사학(史學)에 대하여 조예가 많으신 어른으로 여러 방면에 조선을 위하여 공헌한 바가 많습니다. 나와는 친척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평시부터 동지로 지내오던 터인데 그가 지금까지 해 온 일을 보면 자기 일신을 위한 것이 한 가지도 없고 국가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일해 왔습니다. 그가 아들도 없고 집도 없이 이렇게 서거하게 됨을 사회의 죄라 할까요. 그의 죄라 할까요? 영양 부족으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는 조선 사람의 생각이 어떠할는지요? 장사 지낼 비용도 한 푼 없습니다마는 동지들의 힘으로 그렁저렁 지나 볼까 합니다.”

19세기발전소 대표

※ 위 글은 당시 지면 내용을 오늘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풀어서 옮기되, 일부 한자어와 문장의 옛 투를 살려서 100년 전 한국 교양인들과의 소통을 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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