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예술을 잇다…존재를 그리는 동양의 언어
10월 31일까지 해남·진도·목포 일원
동아시아 해양 문명에 대한 예술적 성찰
조선 회화 미학부터 AI 수묵까지 재해석
기술·정치·감각이 교차하는 예술 언어

2025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가 전라남도 해남, 진도, 목포 일대에서 오는 10월 31일까지 개최된다.
올해로 4회를 맞이한 이번 비엔날레는 '문명의 이웃들-Somewhere Over the Yellow Sea'를 주제로 동아시아 해양 문명권의 교류와 연속성에 주목한다.
수묵을 주제로 한 세계 유일의 국제 비엔날레로 자리매김한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는, 서구 중심의 미학과 이론이 지배적인 글로벌 예술 담론 속에서 동아시아적 감각과 철학의 자율성을 중심에 둔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수묵은 단순한 재료나 기법을 넘어 자연과 세계를 해석하는 동양 고유의 존재론적 사유가 담긴 예술 언어이며, 전라남도는 이러한 수묵 정신이 형성되고 실천되어온 핵심 지역이다.

◇해남=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회화미학의 결정판
해남 고산윤선도 박물관에서는 공재 윤두서와 겸재 작품을 통해 조선시대 회화미학을 재평가하고 남도가 수묵문명의 뿌리였음을 탐구하며 시작한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회화와 그 시대적 배경을 해설하는 시각 자료를 통해 관람객이 전통 수묵의 조형 언어와 미학적 특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공재의 '세마도' 원본을 최초로 공개하고, 겸재의 산수화 원본 작품도 함께 선보이며, 조선 후기 수묵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진도=한국 근현대를 수놓은 서예와 수묵의 대가들


◇세계 수묵의 용광로 '목포'
20개국, 지역 63인의 현대수묵 작가들이 전통의 혁신과 재료의 확장을 실험하며 목포 문화예술회관과 실내체육관에 집결했다.
목포 문화예술회관은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설치, 영상 기반 미디어 작품, 스토리텔링 공간 구성 등을 통해 수묵의 여백, 흐름, 기운생동의 개념을 동시대적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대표적으로 팀랩의 몰입형 미디어 작업은 자연현상을 알고리즘으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빛과 영상, 공간의 흐름을 통해 전통 수묵이 표현해온 자연의 유동성과 비정태성을 시각화한다. 스크린 위를 유영하는 이미지들은 붓 대신 빛으로, 종이 대신 공간으로 펼쳐지며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하나의 '유동하는 수묵 회화'을 제안한다.
반면, 파라스투 포로우하르의 'Written Room'은 페르시아 문자로 구성된 패턴을 벽면 전체에 반복적으로 배열하는 공간 설치 작업이다. 파시(Farsi) 라고 불리는 이란의 문자를 기반으로 한 이 작업은, 언뜻 보기에 아름다운 장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읽히지 않는 글자들로 구성돼 있다.
작가는 전시 개막을 앞두고 약 2주간 현장에 머물며 직접 벽면에 문자를 그려 넣는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 역시 사라진다. 이처럼 장소에 고정되어 수행되고 다시는 복원되지 않는 작업의 속성은, 수묵이 지닌 무상함과 여백의 긴장감, 그리고 회화가 아닌 '행위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 문자들은 '죽은 언어'로서 공간을 침묵 속에서 지배하며, 억압된 정치적 기억과 권력의 잔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마리안토는 정치적 트라우마와 신체, 권력의 상징성에 천착한 작업을 통해 수묵의 정서를 재해석한다. 아시아 현대사 속에서 반복된 폭력과 침묵의 흔적은 수묵을 하나의 서정적 양식이 아닌 비판적 표현 수단으로 확장시킨다. 지민석은 전통 불화 형식을 차용한 회화 '스타벅스'를 통해 동아시아 시각문화의 상징성과 현대 소비사회의 아이콘을 교차시킨다. 작가는 전통 채색화의 기법과 구성을 바탕으로 스타벅스 컵을 손에 쥔 보살 형상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신성과 욕망, 초월성과 일상의 경계를 유머러스하게 흔든다.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