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예술을 잇다…존재를 그리는 동양의 언어

정유진 기자 2025. 8. 31.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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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개막]
10월 31일까지 해남·진도·목포 일원
동아시아 해양 문명에 대한 예술적 성찰
조선 회화 미학부터 AI 수묵까지 재해석
기술·정치·감각이 교차하는 예술 언어
공재 윤두서의 '세마도'.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사무국 제공

2025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가 전라남도 해남, 진도, 목포 일대에서 오는 10월 31일까지 개최된다.

올해로 4회를 맞이한 이번 비엔날레는 '문명의 이웃들-Somewhere Over the Yellow Sea'를 주제로 동아시아 해양 문명권의 교류와 연속성에 주목한다.

수묵을 주제로 한 세계 유일의 국제 비엔날레로 자리매김한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는, 서구 중심의 미학과 이론이 지배적인 글로벌 예술 담론 속에서 동아시아적 감각과 철학의 자율성을 중심에 둔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수묵은 단순한 재료나 기법을 넘어 자연과 세계를 해석하는 동양 고유의 존재론적 사유가 담긴 예술 언어이며, 전라남도는 이러한 수묵 정신이 형성되고 실천되어온 핵심 지역이다.

올해 비엔날레는 해남·진도·목포를 하나의 삼각 동선으로 연결하는 전시 구조를 통해, 수묵의 전통과 실험, 철학과 기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복합적 시공간을 구성한다. 전시장은 각 지역의 역사성과 공간성을 반영하며, 수묵의 물성과 미학을 기반으로 한 회화뿐 아니라 설치, 사운드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한 작업을 선보인다.
 
로랑 그라소 作 '과거에 대한 고찰'

◇해남=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회화미학의 결정판

해남 고산윤선도 박물관에서는 공재 윤두서와 겸재 작품을 통해 조선시대 회화미학을 재평가하고 남도가 수묵문명의 뿌리였음을 탐구하며 시작한다. 역사적 가치가 높은 회화와 그 시대적 배경을 해설하는 시각 자료를 통해 관람객이 전통 수묵의 조형 언어와 미학적 특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공재의 '세마도' 원본을 최초로 공개하고, 겸재의 산수화 원본 작품도 함께 선보이며, 조선 후기 수묵의 정수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은 수묵의 정신을 바탕으로, 다산 정약용과 김환기, 로랑 그라소, 린타로 하시구치 등 7인의 작업을 통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전시 공간을 선보인다. 해남의 역사적 장소인 녹우당과 공재 윤두서의 예술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전통 수묵의 정신성과 그 미학적 가치를 재조명한다. 또 다도(茶道), 향도(香道), 화도(畵道) 등 전통 예술의 감수성과 수묵의 철학이 교차하는 지점을 시각화하며 관람자가 이를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박생광 作 '호랑이와 모란'

◇진도=한국 근현대를 수놓은 서예와 수묵의 대가들

소전미술관은 근대 최고의 서예가이자 감식가인 손재형 선생을 기리는 전시로, 문자의 조형성과 필획의 감각을 수묵의 시각 예술로 확장한 서예 중심의 전시를 선보인다. 추사 김정희를 비롯해 석파 이하응, 석재 서병오, 소전 손재형, 검여 유희강, 철농 이기우, 학정 이돈흥, 목인 전종주 등 총 8인의 작가가 참여하며, 정제된 여백과 역동적인 선의 흐름이 어우러지는 공간 연출을 통해 문자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예술적 형식으로 승화되는 과정을 조명한다. 시각 자료와 입체적 공간 구성으로 서예에 대한 현대적 감각을 제시한다.
석파 이하응 作 '석란도병풍'.
고암 이응노, 내고 박생광, 산정 서세옥, 남천 송수남, 소정 황창배 등 5인의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선보이며 수묵의 추상성 및 채색 기법의 실험성을 부각한 전시다. 작가별 독창적인 표현 방식을 살린 공간 배치와 명암, 색채 대비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관람객이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감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전시 환경을 조성해 수묵이 지닌 시각적·감성적 확장 가능성을 제안한다.
 
파라스투 포로우하르 作 'Written Room'.

◇세계 수묵의 용광로 '목포'

20개국, 지역 63인의 현대수묵 작가들이 전통의 혁신과 재료의 확장을 실험하며 목포 문화예술회관과 실내체육관에 집결했다.

목포 문화예술회관은 관객 참여형 인터랙티브 설치, 영상 기반 미디어 작품, 스토리텔링 공간 구성 등을 통해 수묵의 여백, 흐름, 기운생동의 개념을 동시대적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대표적으로 팀랩의 몰입형 미디어 작업은 자연현상을 알고리즘으로 시뮬레이션함으로써, 빛과 영상, 공간의 흐름을 통해 전통 수묵이 표현해온 자연의 유동성과 비정태성을 시각화한다. 스크린 위를 유영하는 이미지들은 붓 대신 빛으로, 종이 대신 공간으로 펼쳐지며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하나의 '유동하는 수묵 회화'을 제안한다.

반면, 파라스투 포로우하르의 'Written Room'은 페르시아 문자로 구성된 패턴을 벽면 전체에 반복적으로 배열하는 공간 설치 작업이다. 파시(Farsi) 라고 불리는 이란의 문자를 기반으로 한 이 작업은, 언뜻 보기에 아름다운 장식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읽히지 않는 글자들로 구성돼 있다.

작가는 전시 개막을 앞두고 약 2주간 현장에 머물며 직접 벽면에 문자를 그려 넣는다. 그리고 전시가 끝나면 이 작품 역시 사라진다. 이처럼 장소에 고정되어 수행되고 다시는 복원되지 않는 작업의 속성은, 수묵이 지닌 무상함과 여백의 긴장감, 그리고 회화가 아닌 '행위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하지 않는 문자들은 '죽은 언어'로서 공간을 침묵 속에서 지배하며, 억압된 정치적 기억과 권력의 잔재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처럼 문화예술회관에 설치된 작품들은 각각 기술과 언어, 움직임과 정지, 감각과 구조 사이의 긴장을 통해 수묵의 정체성을 다양한 방식으로 교차시키고 있다. 관람객은 이러한 대비적 구성을 통해 수묵이 단지 전통적인 회화 기법이 아니라, 기술·기억·젠더·정치·철학이 교차하는 동시대의 예술 언어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마리안토 作 'The Sovereign of Mount Merapi'.
목포 실내체육관은 전통적인 전시 공간의 경계를 넘어, 체육관이라는 일상적 장소에서 수묵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전시다. 먹, 물, 종이라는 섬세한 물성을 지닌 수묵은 고유의 미학과 함께 기술적 제약을 내포한 매체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제약을 오히려 동시대 예술 언어로 확장시킨다. 정체성, 기억, 정치적 역사 등 오늘날의 사회적 이슈들을 수묵의 조형성과 철학을 통해 재해석한 대형 회화, 설치 작품들이 체육관 전면에 배치되며, 익숙한 공간을 낯설게 변모시킨다. 이는 수묵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전시장이라는 제도적 틀을 벗어나 예술의 감각적·공간적 확장을 시도하는 실험적인 전시다.
 
지민석 作 '스타벅스'.

대표 작가 중 한 명인 마리안토는 정치적 트라우마와 신체, 권력의 상징성에 천착한 작업을 통해 수묵의 정서를 재해석한다. 아시아 현대사 속에서 반복된 폭력과 침묵의 흔적은 수묵을 하나의 서정적 양식이 아닌 비판적 표현 수단으로 확장시킨다. 지민석은 전통 불화 형식을 차용한 회화 '스타벅스'를 통해 동아시아 시각문화의 상징성과 현대 소비사회의 아이콘을 교차시킨다. 작가는 전통 채색화의 기법과 구성을 바탕으로 스타벅스 컵을 손에 쥔 보살 형상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신성과 욕망, 초월성과 일상의 경계를 유머러스하게 흔든다.
/정유진 기자 jin1@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