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도 42.195㎞ 포기하지 않는 법, 안내견 나리한테 배워요"
사회초년생 때 폐결핵... 러닝 시작해 선수로
새벽 4시 30분 기상 "목표 정하면 지독하게"
"훌륭한 선수 되면 제 목소리 귀 기울이겠죠"

"저희 나리는 만난 지 2개월밖에 되진 않았지만 저를 너무 좋아해서 집착이 심해요. 그래도 체력이 엄청 좋고 함께 걸으면 즐겁게 일한다는 게 느껴져서 덩달아 힘이 나요."
지난 25일 오전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시각장애인 마라토너 선지원(34·한국전력공사·전남장애인육상선수단)씨는 함께 온 안내견 나리를 '짝꿍'이라며 이렇게 소개했다. 인생을 늘 바쁘고 열정적으로 살아온 그처럼 나리도 지독한 '워커홀릭'이라며 꼭 자신을 보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리는 그의 말마따나 '안내견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뽐내려는 듯 인터뷰 내내 선씨의 발치에 엎드려 그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선씨는 이제 조금은 세상에 알려진 마라토너다. 가이드러너(함께 뛰며 경기 중 길 안내·보조를 맡는 선수)와 '트러스트링'이라는 끈으로 이어져 달리는 방식으로 42.195㎞를 완주한 사연 때문이다. 실력도 출중해서 전업선수가 된 지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지난해 전국장애인체전 10㎞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기까지 했다.
야근에 시달리던 직장인이 마라톤 선수로

불과 8년 전만 해도 선씨는 평범한 20대 회사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3세에 취업과 함께 상경, 앞만 보고 내달렸다. 매일 저녁 늦게까지 이어지는 야근, 최저시급 수준의 박봉에도 "나 말고도 사회초년생은 다 어려워"라며 하루하루 버텼다. 세끼 라면만 먹는 날도 많았다. 결국 몸이 일찍 신호를 보냈다. 폐결핵에 걸린 것이었다. 선씨는 "그렇게 돈을 모으려고 고생을 했는데 다 병원비로 나가니까 헛수고더라"며 "건강이 재산이란 생각에 운동을 시작하게 됐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운동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헬스장과 필라테스 교실에선 다른 회원들이 안내견을 불편해한다거나 운동하다가 다칠 경우 책임 소재 때문에 등록이 어렵다고 했다. 그렇게 선택한 것이 자유롭게 뛸 수 있는 러닝이었다.
"처음 동호회에 들어갔을 때 어떤 아저씨가 뒤에서 코칭을 해주시면서 '싹수가 보인다'고 하시더라구요. 지나서 보니 영업용 멘트였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시기에 칭찬을 받으니까 열심히 하면 나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이란 자신감이 생겼어요."
나를 똑닮은 나리는 '행복 바이러스'

그렇게 동호회 러너에서 아마추어 선수로, 이제는 국가대표를 목표로 뛰는 전업선수가 됐다. 주변의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이는데 너는 언제나 해내더라"는 말이 힘이 됐다. 목표를 정하면 앞뒤 안 재고 끝장을 보는 '지독한' 사람인 건 여전하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대중교통을 타고 한 시간 반을 걸려 압구정동 훈련센터에 가는 선씨에게 아무리 걸어도 지치는 기색이 없는 나리는 그 누구보다 든든한 동료다.
대학생 새내기였던 19세 때부터 24시간 함께하는 안내견은 늘 선씨에게 없어선 안 될 동반자다. 그동안 함께한 네 마리의 안내견은 성격이 모두 가지각색이었다. 애교도 많고 발랄한 새솔이, 피부병이 있어 빨리 은퇴했지만 충성도가 높았던 달래.
올해 6월 새솔이의 은퇴 이후 선씨에게 찾아온 나리는 그중에서도 성격이 자기랑 똑 닮았단다. 삼성화재 안내견학교에서는 인터뷰를 통해 시각장애인의 성격이나 생활 방식, 환경 등을 조사해 가장 잘 맞는 안내견을 매칭하는데 이번엔 유달리 튼튼한 나리가 선씨에게 온 것이었다. 특히 선씨가 훈련하는 동안 심심한 나리가 구석에 앉아 뾰로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게 웃음 포인트란다.
"코치님이 호흡법은 나리한테 배우라고 하실 정도예요.(웃음) 리트리버는 성격이 단순하고 온순해서 '행복 바이러스'가 있는데 회복탄력성이 엄청 강해요. 선수 생활이 몸도 힘들지만 멘털 관리를 잘 해야 하는데, 늘 한결같이 기분이 좋고 저를 즐겁게 해주는 나리한테 오히려 배워요."
2028년 LA까지 산 넘어 산... 그래도 달린다

선씨의 당장 목표는 내년 일본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과 2028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리는 패럴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당장 10월 열리는 전국장애인체전에서 또 한 번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 현재 3시간 50분대 풀코스 기록도 패럴림픽 출전 기준기록인 3시간 20분대까지 당겨야 한다. 국내에는 시각장애인 선수의 풀코스 공식 기록을 측정할 수 있는 공인 대회가 없어 해외 대회에 출전해 좋은 기록을 내는 것도 해결해야 하는 과제다.
경제적으로도 빠듯할 수밖에 없다. 수입이 늘었지만 훈련비 등 지출은 더 늘었다. 잊을 때마다 돌아오는 부상도 걸림돌이다. 가이드러너와 함께 뛰어도 대회 중 다른 러너와 부딪치거나 넘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다행히 그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개인적으로 그를 응원하고 후원하는 팬들도 생겼다. 지난 5월부터는 장애인 육상선수로는 이례적으로 뉴발란스의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선씨는 "지금도 물리치료를 받고 싶은데 돈이 없어서 최대한 참았다가 간다"며 "그래도 익명으로 도와주시는 분들이 엄청 많이 생겨서 10명이나 된다"며 미소 지었다.
"제 인생 목표요? 소박하긴 한데요. 장애인도 동네 헬스장이나 수영장을 장벽 없이 드나들면서 취미도 즐기고 평범하게 직장 생활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거예요. 제가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훌륭한 선수가 되면 목소리를 낼 수 있지 않을까요. 목표가 사람을 뻔뻔하게 만들잖아요. 진짜 열심히 할 거예요."
이승엽 기자 s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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