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절유랑일번지 [한경록의 캡틴락 항해일지]


한경록 | 밴드 ‘크라잉넛’ 베이시스트
최근에 작사 의뢰를 받아 바쁜 일정을 쪼개 가사를 넘긴 적이 있다. 마감까지는 고작 6일. 대형 기획사의 의뢰였고, 음악도 시원시원하니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나의 창의력은 여전히 화수분처럼 샘솟고 있으니, 6일이면 단편 소설 한편도 거뜬히 쓰겠다는 자신감에 흔쾌히 제의를 받아들였다. 언제나 그렇듯, 역시나 오만했다.
마감의 공기는 청산가리를 머금은 검푸른 안개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5일 동안 쉬는 순간조차 휴식 같지 않았고, 일상은 균형이 어긋난 조형물을 바라보는 듯 불편했다. 책상에 앉는 일은 꼴 보기 싫은 직장 상사와 함께 떠난 지방 출장에서 억지로 1박을 견뎌야 하는 기분과도 같았다.
결국 마감 하루 전, 집 정리와 빨래, 청소를 다 마친 뒤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한줄도 못 쓰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트럭 위를 탈출한 돼지처럼 이어폰 하나 들고 헬스장으로 갔다. 온몸 여기저기 근육을 쥐어짜내면 창의력이 땀처럼 삐질삐질 흘러나올 것 같았다. 작업할 음악을 10분쯤 들으며 운동하다가, 부담감에 토할 것 같아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로 귀를 돌렸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침실로 피신해 단잠을 취한 뒤, 아침에 책상으로 끌려갔다. 정오까지 마감인데 여전히 한줄도 못 쓴 상태였다. 집인데도 괜히 아무도 없는지 주위를 살피고, 책상 위에 엎드려 머리를 쥐어뜯었다. “멍청한 새끼, 왜 사서 고생을 한 거야.” 나 자신이 마치 헤밍웨이라도 된 듯이 고뇌에 빠져 있다가, ‘그래, 한줄이라도 써 보자’라는 심정으로 펜을 그어 봤다.
하얀 종이 위에 부싯돌이 스치듯 반짝임이 지나갔다. 그 순간을 붙잡아 가사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목은 ‘부싯돌’(Flint). 속으로 “역시 나는 천재로군!”이라 지껄이며, 조금 모자란 듯한 미소를 지으며, 파도를 잡은 서퍼처럼 써 내려갔다. 마감은 하루 연장해 달라고 부탁했고,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밤새 글을 썼다. 밥도 안 먹고 커피와 과자 부스러기로 버티며, 나의 영혼과 몸속에 남은 단백질·탄수화물·비타민까지 긁어모아 가사로 녹여냈다.
가사를 다 쓰고 나니 도파민까지 소진돼 몽롱하고 고단했지만 묘한 충만감이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형님은 하루 일정량을 꾸준히 쓰고 러닝을 하며 작가로서의 루틴을 만들었다는데, 그 양반 참 대단하다 싶었다.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닥치는 대로 부딪히며 해결사처럼 버텼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토닥였다.
그리고 3주 만에 회신이 왔다. “아쉽지만 까였습니다.” 더 정중한 말로 연락이 왔을 텐데 우아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매니저를 통해 결과를 전달받는 순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는데 면이 코로 나와서 귀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썩은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누가 봐도 쿨하지 않을 쿨한 표정을 지으며 면발을 삼켰다. 속에서는 붉은 토마토 소스가 내장 벽을 타고 쓰라리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밤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뒤풀이도 거르곤 집에 와 기절하듯 쓰러졌다. 다음날 아침 요가와 피티 수업이 있었지만, 늦잠으로 무단결석했다. 로커 치고는 아침잠이 없는 편인데, 여러모로 고단했는지 알람조차 필요 없던 내가 그대로 뻗은 것이다. 피티 선생님께 간단한 사과 문자를 보내긴 했는데, 위와 같은 사정으로 결석했다고 이 지면을 빌려 전하고 싶다.
이렇게 솔직한 감정을 수다처럼 풀어놓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작사하는 동안은 괴로웠지만 이상하게도 다른 근심 걱정은 떠오르지 않았다. 몰입의 황홀한 여행이랄까. 정말 나는 우주에 다녀온 듯, 다른 중력과 시공간을 여행한 느낌이었다. 단지 어제 탈락 통보를 받았으니, 지금은 약간의 시차 적응 중일 뿐이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피할 일도 아니고 못난 일도 아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일을 글로 남긴 이유는, 나의 작은 좌절이 누군가에게 깨알 같은 웃음이나 위로가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모든 실패는 영감의 재료다. 지금 이 칼럼의 글감처럼. 스쳐 지나간 좌절의 순간들이 새로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좌절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농담 같은 추억거리가 된다. 이야깃거리가 많은 인생은 언제나 즐겁다.
끝으로 까인 가사를 몇자 적어 본다. 이 가사로 새 노래를 만들어 볼까 했지만, 그냥 그 마찰 그대로 남겨두기로 했다.
부싯돌
푸른 밤 별처럼 박혀있는 신비로운 그 눈빛/ 이리저리 구르던 부싯돌은 밤을 그어 만나고 싶어 빛나고 싶어/ 흐르는 석양의 강을 건너, 밤 하늘 세로질러 너에게 닿고 싶어/ 타올라 찬란히 부서질 우리의 불꽃놀이, 내 마음은 소용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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