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특집]AI가 바꾸는 세상, 길을 묻다<8>스마트 거버넌스의 탄생…디지털 민주주의 일상에 뿌리내리다

이영란 기자 2025. 8. 3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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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세상…민주주의, 정치의 미래, AI기술 혁신과 시민 참여,
인공지능이 그린 미래 사회의 모습.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정치 체제인 민주주의가 21세기 들어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에서 시작해 근대 대의 민주주의로 발전해온 민주주의는 이제 기술 혁명과 시민 의식의 성장을 바탕으로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하고 있다.

◆대의 민주주의 한계와 리퀴드 데모크라시

전통적인 대의 민주주의는 인구 증가와 사회의 복잡성 증대로 인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시민들이 대표자를 선출하고, 그들이 국민을 대신해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시스템은 수백 년간 민주주의의 표준 모델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시스템의 한계가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정치인과 시민 간의 괴리, 특수 이익집단의 영향력 증대, 복잡한 현안에 대한 단순화된 의사결정 등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정치 불신이 최고조에 달하면서, 유권자들은 더 이상 전통적인 정치 엘리트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 '리퀴드 데모크라시(Liquid Democracy)'다. 리퀴드 데모크라시는 2000년대 초 독일의 해적당에서 처음 구체화된 개념으로, 민주주의 참여 방식을 한층 유연하고 다양하게 만든다. 직접 민주주의와 대의 민주주의의 장점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모델로, 시민들이 특정 이슈에 대해 직접 투표하거나 신뢰하는 전문가에게 자신의 투표권을 위임할 수 있다.

◆AI와 블록체인의 정치혁명과 똑똑한 유권자

'리퀴드 데모크라시'와 같은 정치 참여의 혁명이 가능한 것은 단연 기술의 발전 덕분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정치 참여를 가능하게 했고, 블록체인과 AI 기술은 이를 더욱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만들고 있다. AI는 예측 모형과 데이터 분석 능력을 통해 정치 전략을 정교화하며, 정책 영향 평가와 시민 의견 파악에 큰 도움을 준다. AGI가 본격 등장하면, 인간 수준을 넘는 종합적 판단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통해 더욱 복잡한 정치 현안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미래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여기에 한몫 더 하는 것이 똑똑해진 유권자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정치 엘리트들의 권력 기반이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의 발달로 정보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제 시민들은 정치인의 발언을 실시간으로 팩트체크하고, 정책의 영향을 독립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워싱턴 D.C.에 본사를 둔 비영리 싱크탱크인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조사에 따르면, 35세 이하 시민의 78%가 정치인의 발언을 듣고 즉시 온라인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고 답했다. 이는 10년 전 32%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집단지성이 창출하는 '스마트 거버넌스' 시대 도래

개별 시민의 역량 향상과 함께 주목할 만한 현상은 집단지성의 발현이다.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수많은 시민이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전문가 못지않은 수준의 정책 대안을 만들어내고 있다.

클로드(claude) 딥리서치에 따르면 대만 'vTaiwan'과 핀란드 'Open Ministry'프로젝트는 시민이 직접 법안을 제안하고 합의하는 시스템이다. 특히 대만의 'vTaiwan(virtual Taiwan·가상 대만)' 플랫폼은 집단지성을 활용한 정책 결정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015년 우버 규제 문제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었을 때, 정부는 vTaiwan을 통해 모든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온라인 숙의 과정을 진행했다. 4주간 진행된 이 과정에는 택시 기사, 우버 운전자, 일반 시민 등 2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AI 알고리즘이 다양한 의견을 종합해 합의점을 도출했다. 그 결과 모든 이해관계자가 수용할 수 있는 규제 방안이 마련되었고, 이는 이후 정식 법안으로 채택되었다.

◆새로운 정치 공동체의 형성

전통적인 정당 정치가 쇠퇴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정치 공동체 등장도 예고된다. 특정 이슈를 중심으로 모인 시민들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슈 네트워크'가 대표적이다. 미국의 'Sunrise Movement'는 청년들이 주도하는 기후정의운동으로, 전통적인 환경 단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활동한다. 소셜 미디어를 통한 대중 동원, 직접 행동, 선거 개입 등을 통해 단 몇 년 만에 미국 정치 지형을 바꿔놓았다. 이들이 제안한 '그린 뉴딜'은 이제 민주당의 핵심 정책이 되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DAO(탈중앙화 자율 조직)'의 등장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이 조직들은 중앙 권력 없이도 민주적 의사결정과 집행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UkraineDAO'는 단 일주일 만에 800만 달러를 모금하고, 투명하게 집행했다. 이는 전통적인 국제기구나 NGO보다 훨씬 빠르고 효율적이었다.

박영숙 유엔미래포럼회장은 "AI는 다양한 변수와 장기적 결과를 고려한 합리적 의사결정 지원을 가능케 해 정치의 질을 한층 높일 것"이라며 "기술개발자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는 복잡한 데이터 처리와 시뮬레이션으로, 최적의 정책 대안을 도출하는 '스마트 거버넌스'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고 전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과 과제

물론 시민 참여 정치의 확대가 장밋빛 미래만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디지털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가운데 여전히 디지털 접근성 격차가 남아 있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상당수 인구가 여전히 인터넷 접근이 제한돼 있어 정치 참여 불평등 문제를 낳는다.

또한, 잘못된 정보와 가짜 뉴스가 급속히 확산돼 민주적 의사결정의 질을 위협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거짓 정보가 진실보다 6배 빠르게 퍼진다는 연구 결과는 민주주의가 직면한 심각한 위험성을 보여준다.

시민들의 잦은 참여 요구는 '참여 피로'를 촉발할 수 있고, 즉각적인 온라인 여론조사와 투표는 장기 정책 숙고를 어렵게 할 수 있다. 포퓰리즘적 경향 강화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복잡한 경제 정책이나 외교 안보 문제를 단순한 찬반 투표로 결정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 참여 정치의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도전과제들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민주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미래 정치=기술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

AI와 AGI가 정치에 깊숙이 관여할수록 투명성과 책임 문제가 중요해진다. 편향된 알고리즘, 데이터 조작, 사이버 공격 위험 등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따라서 AI 결정 과정의 설명 가능성과 인간 감독 체계 구축, 법적·윤리적 규범 정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미래전문가들의 조언이다. AI를 인간의 정치적 판단을 보조하고 시민 참여를 촉진하며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도구로 활용하는 한편, 인간은 윤리적 판단과 정치적 책임을 수행하며 민주주의의 본질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 이 과정에서 새로운 법·윤리체계, 교육 강화, 거버넌스 혁신 등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박 회장은 "인류는 AI와 AGI라는 전례 없는 도전과 기회를 맞았다. 향후 20년은 기술 주도의 정치 변화가 본격화되는 시기로, 우리는 이 흐름을 둘러싼 위험과 기회, 그리고 윤리와 책임 문제에 깊이 천착하며 미래 민주주의를 설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급진전하고 있는 기술력 앞에 이제 민주주의는 전문가나 정치인만의 영역이 아니게 됐다. 바야흐로, 기술과 교육에 힘입어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정치가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영란 기자 yrlee31@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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