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통제 속, 중화요리점의 생존 전략

조양 2025. 8. 3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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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문화] 일제강점기 조선 중화요리점의 발전과정과 대응전략②
1967년 출범한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원은 제주대학교 최초의 법정연구소라는 위상을 지니고 있다. 특히 학술지 '탐라문화'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재지 선정, 인문사회연구소지원사업선정 등 제주에 대한 연구를 세상을 알리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제주의소리]는 탐라문화연구원과 함께 '탐라문화' 논문들을 정기적으로 소개한다. 제주를 바라보는 보다 넓은 창이 되길 기대한다. 연재분은 발표된 논문을 요약·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AI 생성 이미지.

2. 일제강점기 조선 중화요리점의 위기 대응 전략

2.1 일제의 정책 변화와 위기

일제강점기 조선의 중화요리점은 192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증가하며 시장을 확대했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전시 경제 정책과 각종 통제로 인해 심각한 경영 위기를 맞았다. 본 장에서는 중화요리점이 직면한 구조적 위기와 이에 대한 화교 경영자들의 대응 양상을 정책 변화 중심으로 고찰한다.

1925년 중화요리점 수는 1,670개로 급증했으며, 이로 인해 시장 경쟁이 심화되고 자본력이 부족한 소규모 점포들이 경영 압박을 받았다. 일부 경영자들은 조리법의 간소화나 신메뉴 개발을 통해 차별화 전략을 시도하며 생존을 모색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은 조선을 포함한 식민지에 전시 동원 체제를 적용하였다. '수출입품등임시조치법'과 '국가총동원법'은 식재료 수입과 유통을 제한하고, 국가의 경제 자원을 군수 산업에 집중하도록 강제하였다. 이로 인해 중화요리점은 원재료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경영 기반이 약화되었다.

경제 통제는 가격과 세금 정책을 통해 더욱 강화되었다. 1939년 '가격등통제령' 시행 이후 중화요리 가격은 낮은 수준으로 고정되었고, 1941년 음식세는 15%에서 30%로 인상되었다. 또한 1940년 '사치품등제조판매제한규칙'은 조리 가격 상한선을 규정해 고급 요리를 제공하던 점포의 수익 구조를 제한하였다.

식자재 배급제 역시 중화요리점에 큰 제약을 가했다. 1939년 쌀, 1940년 밀가루에 대한 배급 통제가 시작되면서 중화요리점의 주된 식재료 확보가 불가능해졌고, 이는 직접적인 영업 타격으로 이어졌다.

한편, 1941년 '기업허가령'과 1942년 '기업정비령'은 소규모 민간업체를 통폐합 대상으로 삼았으며, 음식업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943년부터는 본격적인 기업 정비가 시행되며 화교 경영의 중화요리점은 폐업 혹은 합병 압력을 받았다. 인력 면에서는 1942년 '노무조정령'과 1943년 '남자십일종직업금지령'에 따라 청년 종업원의 이탈이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단순한 외부 환경 변화가 아니라, 일제의 전시 동원 체제에 기반한 구조적 통제였으며, 이는 중화요리점의 지속적인 운영을 근본적으로 제약하였다. 일부 점포는 협업 구매나 메뉴 단순화를 시도하며 대응했지만, 정책의 강도와 범위를 감안할 때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중화요리점이 폐업하거나 장기 휴업 상태에 놓이며, 조선 내 중화요리 업계는 일제 말기에 뚜렷한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
  
2.2 중화요리점의 위기 대응

일제강점기 중화요리점은 치열한 시장 경쟁, 자원 부족, 정책적 압박 속에서 위기 극복을 위해 다양한 대응책을 강구했다. 본 절에서는 동업조합 결성, 시장 대응 전략, 전시 통제기 대응 세 가지 측면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첫째, 1910~20년대 산업 전반에 동업조합이 설립되었으며, 중화요리점 역시 이에 참여해 경쟁 억제와 업계 질서 유지를 도모했다. 1921년 '중화민국요리점조합'은 경기도청 인가를 받았고, 1922년에는 119개 중화요리점과 음식점이 가입했다. 조합은 회원 출자금과 월 회비를 기반으로 운영되었으며, 회원 간 친목 도모, 위생 관리, 영업 및 대금의 일관성 유지에 주력했다. 종업원 고용 제한, 술·기생 강요 금지, 의심 행위 경찰 신고 의무 등 규칙을 통해 업계 질서를 강화했다. 임원은 이사장 1명, 부이사장 1명, 평의원 8명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정기총회에서 활동과 회계가 보고되었다. 1922년 규약 미이행 시 30원 벌금과 할인 판매 사전 신고 의무가 추가되어 내부 통제가 엄격해졌다.

둘째, 경쟁 심화 속에서 중화요리점은 메뉴 현지화와 광고 마케팅으로 고객층을 확대했다. 전통 중국 요리에서 출발했으나, 현지 재료와 입맛을 반영한 조리법을 개발했다. 1920~30년대 신문 광고에서는 베이징·광둥·상하이 출신 요리사를 홍보하며 정통성 및 품질을 강조했다. 예컨대 '금해원'은 베이징 요리학교 졸업 요리사를 내세워 베이징 요리를 대표 메뉴로 홍보했고, 1938년에는 광둥 출신 요리사를 초빙해 저렴한 점심 특선을 제공했다. 당시 중화요리는 일본식 요소가 혼합되어 현대 중국 요리와는 차별화된 형태였다.

대표 메뉴인 청탕간패, 랄자계, 팔보계, 작금패, 홍소조어의 재료와 조리법을 비교한 결과, 일제강점기 한국 중화요리는 재료의 다양성, 조미료 복잡성, 조리법 등에서 현대 중국 요리보다 단순하고 일본 음식문화가 융합된 특징을 보였다. 예를 들어 청탕간패는 돈부리에 국물을 부어 먹는 일본식 융합 양상을 보였고, 랄자계는 일본식 간장과 설탕 조미법을 사용했다. 이는 중화요리의 현지화와 한중일 음식 문화 상호작용을 반영한다.

셋째, 중일전쟁과 전시 통제기에는 자원 부족과 정책적 제약이 심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음식세 인상과 '사치품 제조판매 제한 규정'을 시행하며 고급 음식점 운영을 제한했다. 밀가루·설탕·식용유 등 주요 원료는 배급제도로 관리되었으며, 밀가루는 도별 수요에 따라 배분되어 영업 실적에 따라 7~43포까지 차등 배급되었다. 설탕 배급량도 1942년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이러한 자원 제한 속에서 화교 중화요리점 경영자들은 협회 설립과 배급 조정을 통해 운영을 최대한 유지하며, 1942년에는 음식점 수와 경영 상황이 일부 회복되었다. 그러나 전쟁 심화와 정책 강화로 경영 환경은 점점 악화되었고, 중화요리업은 이전 전성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 채 제약받았다.

요약하면, 일제강점기 중화요리점은 동업조합을 통한 질서 유지, 현지화된 메뉴와 광고를 통한 고객 확보, 전시 배급 제도와 협회 조직을 통한 위기 극복 등 다각도의 대응을 통해 시장과 정책적 압박에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러나 전쟁과 정책 제약으로 인해 업계 전반의 성장과 발전은 제한적이었다.

일제강점기 화교 중화요리점의 위기 대응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첫째, 화교 공동체의 자율 조직 전통을 확립했다. 동업조합과 협회를 통해 가격과 영업 규범을 통일하고 정보·자원을 공유하며 상호부조 네트워크를 구축해 생존 기반과 협력 체계를 마련했다. 둘째, 한중 음식문화 융합을 촉진했다. 조리법과 식재료를 현지화하고 언론 홍보를 통해 중화요리를 조선인과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대중 요리로 정착시켰다. 셋째, 전시 통제 환경 속에서 자재 배급을 조정하고 내부 상호부조망으로 운영을 지속하며 공동체 회복력을 강화했다. 특히, 중화요리가 향신료 사용을 줄이고 국물 요리, 일본식 덮밥 등 조선·일본인의 식습관에 맞춰 변화한 점은 단순한 경영 전략을 넘어 음식문화 융합의 실천이었다. 중화요리점은 단순한 식사 공간을 넘어 다문화 교류의 사회적 공간이자 화교 공동체의 경제적·자치적 거점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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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 제79호(2025)'에 '일제강점기 조선 중화요리점의 발전과정과 대응전략'라는 제목으로 실은 논문은 [제주의 소리]에 싣기 위해 정리 요약한 것이다.

조양(赵阳, ZHAO YANG)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에서 '연변 조선족 음식문화 변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고,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 중화요리점의 발전과정과 대응전략'(『탐라문화』 제79집, 2025), '제주 부동산투자이민제를 통해 이주한 신화교의 사회적 통합과 문화적 적응'(『중국연구』 제101집, 2024), '제주 중화요리점의 형성과 변천'(『제주도연구』 제61집, 2024) 등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