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기립박수 9분…박찬욱의 풍자, 베네치아를 사로잡다

김은형 기자 2025. 8. 30.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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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서 신작 최초 공개
29일 밤(현지시각) 베네치아 리도섬에서 개최한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어쩔수가없다’ 전세계 첫 상영 직전 열린 레드 카펫에서 박찬욱 감독(왼쪽에서 세번째)과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CJ ENM 제공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았던 ‘올드보이’ 오대수가 칸을 강타한 지 21년 뒤 “유지보수만 수차례” 유만수가 베네치아 리도섬을 뒤흔들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가 전세계 최초 공개된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의 열기가 심상치 않다.

지난 29일 밤(이하 현지시각) 베네치아 리도섬의 팔라조 델 시네마 앞은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레드 카펫에서 박찬욱 감독을 한참 기다린 유럽인들의 입에서는 “감독님 사인해주세요” “영광입니다” 등 또렷한 한국어가 튀어나왔다. 주연배우 이병헌 역시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는 팬들에게 응답하느라 레드 카펫의 짧은 거리를 오래 걸어야 했다. 27일 개막한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관객과 언론이 이 영화에 보내준 환호가 유독 뜨거워 다음달 6일 발표될 수상 결과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 올렸다.

29일 밤 베네치아 리도섬에서 개최한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어쩔수가없다’ 전세계 첫 상영 직전 열린 레드 카펫에서 박찬욱 감독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CJ ENM 제공

‘어쩔수가없다’는 지금까지 공개된 박찬욱 영화 가운데 가장 많은 유머를 장착한 작품이자 이병헌 연기의 가장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전체적인 화면은 그 어느 때보다 녹색의 자연으로 가득 차 있고, 음악 선곡 역시 박찬욱 특유의 클래식한 오리지널 스코어부터 조용필, 산울림, 트로트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어쩔수가없다’는 핑계에 숨어 노동자를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여기는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비판까지 2시간19분의 긴 러닝타임이 거장 감독의 새로운 면모와 노련한 기량으로 꽉 찼다.

“다 이뤘다.”

오래됐지만 구석구석 자신의 손으로 아름답게 꾸민 집, 예쁜 아내 미리(손예진)와 아들 딸 등 힘겹게 대한민국의 중산층 ‘정상 가족’에 도달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순간, 평범한 가장 만수(이병헌)의 삶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외국 회사와 합병하며 그가 관리·감독하던 생산라인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3개월 안에 새 직장을 구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가족을 안심시켰지만 3개월이 지난 뒤 결국 그가 생각해 낸 건 자신과 비슷한 처지로 비슷한 일을 구하거나 하고 있는 사람들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는 인력을 구한다는 가짜 광고를 내 잠재적 경쟁자 명단을 뽑아 실행을 결심한다.

29일 밤 베네치아 리도섬에서 개최한 제82회 베네치아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진출작 ‘어쩔수가없다’ 기자회견 직후 배우 이병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CJ ENM 제공

박 감독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원작소설 ‘액스’를 옮기면서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을 7명에서 3명으로 압축하고 각 살인의 디테일을 ‘박찬욱 풍’으로 대폭 수정했다. 경쟁자 범모(이성민)의 아내 아라(염혜란)의 존재가 대표적으로, 아라는 불안하게 흘러가던 이야기의 긴장감과 웃음을 극대치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망치다 뱀에 물린 만수를 돕겠다며 아라가 요상하게 만수의 다리를 붙잡고 긴급 조치를 할 때 객석에서는 큰 소리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가 크게 흘러나오며 아라와 범모, 만수가 뒤엉켜 싸움을 벌이는 장면 역시 박찬욱이 아니면 상상해내기 힘든 연출로 웃음을 자아냈다.

발버둥치지만 무기력한 만수 캐릭터는 박찬욱의 ‘올드 보이’ 오대수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도 있다. ‘올드보이’에서는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는 이름에 관한 자학적 농담이 나오는 데 견줘 이 영화에서는 “유지보수만 수차례, 유만수”라는 이웃 남자의 조롱이 등장한다. 이병헌은 오대수의 최민식과는 또 다른 색깔의 압도적 연기력을 보여줘 전세계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영화가 끝난 뒤 객석에서는 “브라보” 환호와 박수가 9분가량 이어졌다. 박 감독은 출연 배우들과 일일이 포옹하고 감격에 겨운 듯 객석을 향해 한참 손을 흔들었다. 이병헌 뒤에는 아내인 배우 이민정이 앉아 기쁜 얼굴로 박수를 쳤고, 이미경 씨제이(CJ)그룹 부회장도 총괄제작자 자격으로 상영회에 참석했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 CJ ENM 제공

이날 영화를 본 이탈리아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가이아 세레나 시묘나티는 “언제나처럼 이번 영화도 우아하고 섬세한데 특히 이번에는 주제 의식에 때로 깊게 들어가고 때로는 웃기기도 하면서 정리해고라는 비극적 주제의 진실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뤘다”고 평가하면서 “수상 가능성이 기대된다”고 말했다.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으로 이병헌 팬이 됐다는 불가리아 라디오 기자 히리시모프 라자는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룰수록 오히려 어두워지는 이병헌의 연기가 대단했다”고 추켜올렸다.

월드 프리미어 직후 나온 외신들 반응도 호평이 쏟아졌다. 미국 매체 데드라인은 “이병헌의 놀라운 연기를 담아낸 작품이자,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대한 박찬욱 감독의 응답처럼 보이는 짙은 블랙 코미디”라고 해석했다. 영국 가디언은 “박찬욱 감독의 최고 걸작은 아닐 수 있지만, 지금까지 베네치아 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 중에는 가장 뛰어난 영화다”라고 평했다.

박 감독은 상영이 끝난 직후 “관객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자리였는데, 영화를 본 분들이 찾아와 모두 재미있다고 말해주더라. 그 말이 진심이길 바라고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베네치아/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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