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화려한 베드 러너는 호텔 침대의 인상을 결정하는 요소다. [사진 출처=niraj golhar/unsplash]
명사. 1. 베드 러너(bed runner) 2. (英) 베드 스카프(bed scarf)【예문】호텔에 묵을 때 마다 베드 러너가 신경 쓰인다. 어디에 쓰라는 거야?
베드 러너다. 침대 발치 쪽을 가로지르는 긴 직사각형 모양의 천으로, 흰색 침구와는 달리 장식이 화려하고 천도 도톰하다. 일반적으로 폭 18인치(약 45센티미터)에 길이는 침대 크기에 따라 50~90인치(1.3~2.2미터)까지 달라진다. 소재는 실크, 리넨, 면직물, 인조 스웨이드 등 다양하다. 우리말로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이 딱히 없다 보니 국내 호텔 체인에서도 베드 러너라 지칭한다.¹ 러너는 가구 위나 바닥 등에 까는 좁고 긴 천·깔개를 뜻한다. 테이블 러너를 검색해보면, 천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가운데만 덮은 식탁보처럼 생긴 물건이 등장한다.
¹ 롯데호텔앤리조트 시그니엘 서울 객실 관리 담당자 답변 인용.
식탁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 접시와 수저를 올릴 수 있는 식탁 매트도 아닌 요 물건이 바로 테이블 러너 되시겠다. [사진 출처=jamesStores/ebay]
이불이나 담요 대신 쓰기엔 너무 작고, 한쪽에 치워 두자니 화려한 색상 때문에 은근히 신경 쓰인다. 도통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의 대표주자 격임에도 불구하고, 고급 호텔 객실 마다 빠지지 않고 준비돼 있어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호텔이 베드 러너를 포기 못 하는 근본 원인은 호텔 침구가 흰색이기 때문이다.
흰색 침구는, 인테리어 디자인 측면에서 단조롭다. 뭘 해도 흰색이다. 베개를 50개쯤 쌓지 않는 이상 차별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① 베드 러너는 이토록 밋밋한 침구 인테리어에 개성을 부여하는 시각적 포인트가 된다. 특히 호텔 체인의 브랜드 색상이나 로고를 활용한 베드 러너는 정체성까지 더해주는 훌륭한 요소다.
흰색 침구는, 돈을 들여도 티가 안 난다. 뭘 해도 흰색이니까. 고급 매트릭스에 메모리 폼, 항균 섬유, 저자극 소재를 때려 부어 만들어도 응 흰색이야. 하지만 베드 러너를 바꾼다면 어떨까. 여름엔 시원한 한색 계열로, 겨울엔 난색 계열로 바꾸는 등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확 바꿀 수 있다. 폭이 좁은 관계로 원단을 조금 쓰기 때문에 제작 단가도 저렴하다. 호텔 입장에서는 ② 운영 비용을 아낄 수 있는 효자인 셈이다.
흰색 침구는, 쉽게 더러워진다. 오염물이 쉽게 식별되는 색이다 보니 그만큼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지만, 당장 오늘 밤 잠자리가 더러워지는 건 달가운 상황이 아니다. 특히 외출용 신발을 신고 실내를 돌아다니고, 침대 위에까지 올라가는 서구권(특히 미국) 고객의 경우 신발에 있던 오물이 침대 시트에 묻을 수 있다. 할리우드 영화나 미드를 시청하다가 신발 신고 침대에 눕는 등장 인물²을 보면 몰입감이 산산조각 나기 마련이다. 침대 발치에 걸쳐 놓는 베드 러너는 ③ 신발을 신고 침대에 눕는 고객 때문에 침구가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는 용도로 쓰인다. 실제로 국내 호텔에서도 베드 러너의 용도에 대해 ‘오염 방지용 천’으로 설명³한다. 침대 끝은 신발이 아니더라도 쉽게 오염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투숙객은 침대 끝에 앉아 용무를 보기도 하고, 짐가방 등을 올려놓기도 하기 때문.
이 밖에도 베드 러너가 ④ 룸서비스로 객실로 배달 된 음식 접시와 쟁반 등을 올려두는 테이블 매트 역할을 하거나, ⑤ 발 부분의 이불을 감싸고 쉽게 흐트러지지 않게 해 온도를 유지하는 보온 기능을 갖췄다는 주장도 있다.
²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서구권에서는 주로 온열 기구로 공기를 데우는 방식으로 난방하다 보니, 바닥이 찬 편이다. 바닥 난방에 익숙한 ‘온돌의 민족’ 한국인은 이해하기 힘들만 하다. 미국 내에서도 통일된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집주인의 편의와 의사에 따라 신발을 신은 채로 돌아다니거나, 실내화로 갈아 신거나, 아예 신발을 벗고 실내 생활을 하는 등 ‘신발 룰’은 다양하다. 유현산 한겨레21 기자, 2010.6.8,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서양 사람들은 왜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가나요?’ 참조. │ ³ 롯데호탤앤리조트 시그니엘서울 객실관리 담당자 답변 인용. 더불어 객실 내부의 인테리어 소품 기능도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영화 ‘나 홀로 집에’(1990)의 한 장면. 신발을 신은 채로 침대 위에 당당히 누운 케빈을 보면, 도둑 일당을 잠시나마 응원하게 된다. 정신을 다잡고 간신히 버텨보지만… [사진 출처=20세기 폭스]
야 이…! 침대에서 신발 신고(!) 팝콘 들고(!!) 방방 뛰는(!?!) 충격과 공포의 현장을 목도하면 그만 혼절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이 장면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다. [사진 출처=20세기 폭스]
이쯤 되니 이런 생각이 든다. 호텔이 흰색 침구를 포기하면 되는 거 아닐까.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순백의 침대는 단점을 상회하는 여러 장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호텔 침구의 상징색이 됐기 때문이다.
태초에 호텔 침구는 ‘색상의 경연장’이었다. 20세기 중엽 호텔 객실 사진을 보면, 파랑·노랑·빨강·살구·초록·갈색·꽃무늬·줄무늬 등 온갖 색상으로 개성을 뽐내는 침구를 확인할 수 있다. 객실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가구인 침대를 꾸미고 싶은 호텔리어의 욕망이 느껴진다. 더군다나 강한 색상 덕에 침구에 붙은 이물질이나 오염을 쉽게 가릴 수 있었다. 두 번 세탁할 일을 한 번으로 줄여준다니, 호텔 입장에선 두 손을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물론 더러운 침대에 몸을 눕혀야 하는 투숙객의 기분과는 별개다.
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혼미해지는 천하제일색상뽐내기대회. 1950~1970년대 미국 호텔 및 모텔 사진이다. 위 사진은 모두 과거 미디어 콘텐츠를 수집·큐레이션·판매하는 디지털 레트로 콜렉션 겸 사진 에이전시 플래시박(flashbak.com)의 2017년 아티클 ‘A Look Inside Hotel & Motel Rooms of the 1950s-70s’에서 인용한 것이다. [사진 출처=플래시박]
이런 무지갯빛 관행에 제동을 건 건 웨스틴 호텔이었다. 1999년 9월 웨스틴 호텔 앤 리조트는 대대적으로 천상의 침대(헤븐리 베드 Heavenly Bed) 캠페인을 시작했다. 모기업인 스타우드 호텔 앤 리조트의 배리 S. 스턴리히트 CEO(1960~)가 창안한 이 캠페인은 호텔 침대를 한 단계 끌어올린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맥주 좋아하는 동네 아저씨처럼 생겼지만 억만장자 투자자이자 부동산 거물 배리 스턴리히트다. 스타우드 캐피털그룹 최고경영자인 그의 자산은 44억 달러(약 6조1666억원)에 달한다. (2023년 포브스 보도) [사진 출처=Christopher Michel/위키피디아]
그는 1999년 보도자료에서 “대부분의 호텔 침대는 불편하고, 매력적이지 않다”라며 “수면을 파는 사업인 호텔이 침대를 등한시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당시 진행했던 설문조사에서 여행객은 호텔이 제공하는 중요한 서비스로 ‘안락한 잠자리’를 꼽았고, 응답자의 75%는 “호텔에서 자면 더 피곤하다”라고 답했다.
웨스틴 호텔은 35개 글로벌 호텔 체인의 침대 50개를 한곳에 모으는 것으로 ‘완벽한 침대’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1년 이상의 연구·개발 기간, 3000만 달러의 비용이 투입됐다. 전 세계 지점에서 공통으로 운영하는 매뉴얼을 만들었고 3만9500개의 객실에서 5만2000개의 헤븐리 베드를 도입했다. 스턴리히트 CEO가 코네티컷 저택에서 사용하던 침대를 모델로 삼은 헤븐리 베드는 맞춤형 매트리스와 필로우 탑 매트리스, 3겹의 순면 시트, 거위털 이불, 베개 5개 등으로 구성됐다. 그리고 이 모든 침구는 순백(all-white)이었다. 고급 호텔 하면 떠오르는 푹신한 흰 침대의 이미지는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셈이다.
당시 스턴리히트 CEO는 헤븐리 베드 도입 배경에 대해 “호텔 업계의 속셈은 침대에 돈을 아끼는 거였다. 다들 그 정신 나갈 것 같은 칙칙한 폴리에스테르 침대보⁴를 기억할 거다”라며 “호텔 업계에 꼭 필요한 자극이었다”라고 강조했다.
1999년 호텔 업계에 흰색 폭탄이 투하됐다. 그 폭탄의 이름은 헤븐리 베드였다. [사진 출처=웨스틴 호텔 앤 리조트 웨스틴 스토어]
⁴ 원문은 ‘ crazy earth tone polyester bedspreads’. 어스톤은 갈색, 황갈색, 녹색, 웜그레이 등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색조를 통칭하는 표현인데, 본문에서는 앞뒤 맥락에 걸맞게 의역했음을 밝힌다.
웨스틴 호텔의 캠페인은 파격적이고 공격적이었다. 헤븐리 베드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온 당일, 뉴욕 월스트리트에는 뉴욕증권거래소 입구까지 20개의 헤븐리 베드가 길게 늘어서 있었다. 스턴리히트 CEO는 거래소 안에서 개장 벨을 울리며 ‘악마처럼 일하고, 천사처럼 자라 Work like the devil, sleep like an angel’ 슬로건이 새겨진 모자를 (말 그대로) 뿌렸다. 천사처럼 일하고 악마처럼 자고 싶은 것과는 별개로 갖고 싶다. 뉴욕 그랜드 센트럴 역에도 침대 수십 개를 설치해두고 출근길 승객들을 유혹했다. 이거 못 참는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미국 전역 38개 도시 마다 동시다발적인 이벤트를 펼쳤다. 스카이다이버가 하늘에서 뛰어내려 강 위에 띄운 침대에 착지했고(조지아주 서배너), 시애틀 스페이스 니들 꼭대기에 침대를 설치했다. 주요 공항, 스키장, 카리브해 크루즈 여객선에도 홍보용 침대를 깔았다. 정리하다보니 다들 나사 한두개 쯤은 풀고 살았던 세기말의 감성이 느껴진다.
웨스틴 호텔이 떨군 ‘푹신한 흰 폭탄’에 업계는 초토화됐다. 글로벌 호텔 체인은 일제히 ‘침대 전쟁’에 돌입한다. 메리어트는 2004년 침대와 침구 업그레이드에 1억9000만 달러를 투입했다. 다른 호텔들도 앞다퉈 수면 전문가와 침대 전문업체의 자문을 받아 맞춤 매트리스를 개발하고, 전문적인 숙면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항균·항박테리아·저자극 원단을 쓰고, 온도 조절 젤을 추가했다. 백야 현상이 있는 지역에서는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불청객 같은 여름밤 햇볕을 차단했다. 기나긴 전쟁의 승자는 ‘흰색 침대’였다. 청결과 위생에 더해 최고급의 이미지를 덧입은 흰색 침대는 전 세계 호텔의 표준이 됐다. 흰색 일변도 침대 위에 개성을 더해줄 베드 러너도 덩달아 승전의 기쁨을 누렸으리라.
호텔 측이 염려했던 것보다 관리도 쉬웠다. 컬러 침구와 달리 표백제 등 강력한 세제를 이용할 수 있어 소독 및 세탁이 쉽다. 세탁 과정에서 여러 색이 섞일 걱정 없이 수건·가운 등 다른 호텔 세탁물과 함께 대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점도 효율적이다.
특별한 수면 경험에 매료된 투숙객은 호텔 침대를 통째로 집으로 들고 오기도 했다. 웨스틴 호텔 앤 리조트의 트레이드 마크인 ‘웨스틴 헤븐리 베드’. 웨스틴 공식 쇼핑몰에서 구매하려면 매트리스만 3985달러(200x160센티미터 킹 사이즈 기준), 시트·베개·이불·담요 등을 포함한 침구 세트는 7435달러에 달한다. 원화로 1000만원에 달하는 고가이지만, 현재까지 50만 세트(2024년 기준) 넘게 판매됐다.
가격 한번 살벌하다. ‘천상의 침대(헤븐리 베드)’에서 그 천(天)이 1천만원 할 때 그 천(千)이었을 줄이야. 지역에 따라 가격 차이가 좀 있는 편인데, 위 가격은 캐나다 공식 사이트 판매 가격이고 미국 사이트는 조금 더 저렴하다. [사진 출처=웨스틴 호텔 앤 리조트 웨스틴 스토어]
한때 잠은 사치였다. 이제 잠은 돈이 된다. 잠 못 드는 이들은 ‘꿀잠’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2023년 기준 전 세계 슬립테크 시장 규모는 211억달러(약 29조원)였으며, 2032년까지 연평균 18.3% 성장해 952억달러(약 131조원) 수준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⁵된다. 대체 어디에 쓰라는 건지 영 헷갈리는 ‘천 쪼가리 그거’ 베드 러너와 흰색 침구는, 수면 산업이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변곡점을 상징하는 증거다.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잠이 보약이다. [사진 출처=Kate Stone Matheson/unsplash]
⁵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글로벌 마켓 인사이트, 2024, ‘Sleep Tech Devices Market Opportunity, Growth Drivers, Industry Trend Analysis, and Forecast 2024 - 2032’ 보고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