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과 홍수의 환난, 농부들의 경고

이송희일 영화감독 2025. 8. 30.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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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견문발검]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지난 12일 농업인 기후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기자회견. 사진=기후솔루션

지난 8월 12일, 폭염이 부서져 내리는 광화문광장에서 여섯 명의 농부들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과꽃이 얼고 벼 소출이 줄었으니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거였다. 소송 대상은 국내 주요 온실가스 배출 기업인 한국전력공사와 발전자회사들.

확실히 국내 최초의 기후 민사소송이다. 온실가스 배출 기업에 대한 소송 대부분이 감축 요구에 초점을 맞춰왔는데 이렇게 직접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기야 민사소송의 물꼬가 터질 때도 됐다. 남해에서 강원도까지 예외 없이, 매년 가혹해지는 기후재난으로 농촌의 손실과 고통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산청군의 경우 홍수로 쑥대밭이 되면서 특산물인 딸기 모종이 쓸려 내려갔는데도 보험 적용에서 제외됐다. 심지어 피해 농가 절반이 재해보험 미가입 상태였다. 원성이 파도를 치자 그제서야 예비비 지원이 결정됐다. 또 대형 산불이 덮친 경북에선 송이버섯 농가가 피해를 입었지만 보험 적용에서 배제됐을 뿐 아니라 '송이 대체 작물을 심으라'는 무책임한 말만 돌아왔다.

당연히 분통 터질 일이다. 기후재난 대책이라곤 고작 농작물 재해보험이 전부다. 그저 보험에 가입했냐, 그렇지 않냐는 농부의 선택에 기후재난의 고통과 책임이 고스란히 전가될 뿐이다.

손해배상 청구에 나선 농부들이 지적한 것처럼 이번 소송은 단지 피해를 보상받으려 하는 싸움이 아니라 “누가 기후위기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라는 근원의 질문을 던지는 것이 목적이다. 한전과 5개 발전자회사가 전체 발전량의 95%를 화력발전으로 생산하고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의 4분의 1을 배출하고 있으니 응당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한국뿐 아니다. 기업 책임을 묻는 목소리가 전 세계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난 5월 화제를 모았던 페루 농부와 독일 에너지 기업 RWE간의 소송도 주목할 만하다. RWE가 전 세계 배출량의 0.5%를 차지하니 안데스의 빙하 홍수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소송이었는데 홍수 위험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페루 농부가 패소했다. 하지만 해당 농부와 기후운동가들은 전례 없는 승리라며 판결을 환영했다. 기업의 배출 책임을 판결문에 명시함으로써 향후 손해배상 소송들을 위한 중대한 초석을 깔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보다 파격적인 행보가 일어나고 있다. 최근 버몬트주와 뉴욕주에서 '기후 슈퍼펀드' 법안이 통과됐다. 2년 연속 파괴적인 홍수에 시달린 버몬트 시민들의 분노가 이 진보 정책의 동력이었다. 뉴욕주도 2024년 9월 홍수 재앙에 휩쓸린 후 곧바로 기후 슈퍼펀드를 통과시켰다.

기후 슈퍼펀드란 오염자 부담 원칙에 기반해 기후 피해 복구 비용을 석유 및 가스 기업에게 할당하는 제도다. 1980년 미 환경보호청이 환경 복원의 비용을 오염 기업들이 책임지도록 설계한 '슈퍼펀드'를 오늘날 기후 위기와 온실가스 배출 상황에 맞춰 재구성한 것이다.

기후 슈퍼펀드로 뉴욕주에서는 향후 25년간 화석연료 기업들로부터 750억 달러를 추징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 기금은 인프라 복원, 재생에너지 지원, 취약 계층 지원 등에 사용된다. 버몬트와 뉴욕에 이어, 메릴랜드, 매사추세츠, 오리건, 코네티컷 등에서 비슷한 법안이 추진 중이다.

뉴욕주 상원의원 리즈 크루거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질 총성'이라고 표현한 기후 슈퍼펀드는 주로 진보적인 지역에서 등장하고 있는데, 트럼프 정부와 화석연료 기업들과 공화당이 법안을 무산시키기 위해 온갖 떼를 쓰는 중이다. 법안 자체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저항의 진지가 되고 있다.

이처럼 곳곳에서 오염자 부담이 외쳐지는 이유가 뭘까? 온실가스 배출과 재난 피해의 인과관계를 정량화하는 기후 모델이 발전하는 데다 점점 가속화되는 기후비상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 배출 기업들의 책임을 정확히 물어야 한다는 자각이 빠르게 확산되는 까닭이다. 화석연료 산업에 대한 공공 통제를 통해 이 가공할 위기에서 벗어나자는 절박한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것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평균 섭씨 1도가 상승할 때마다 농사가 망쳐져 세계 1인당 하루 식량에서 120칼로리가 감소하게 된다. 3도 상승하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침 식사를 포기해야 한다. 우리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농부들이 살인 폭염을 온몸으로 맞으며 광장에서 외치는 '기후정의'는 그래서 가장 적확한 과학이자 핵심을 관통하는 절박한 경고다.

간단한 이야기다. 오염을 유발한 자가 책임져라. 오늘 우리를 채찍질하는 이 폭염과 홍수의 환난은 저 간단한 공식이 도무지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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