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스테이블코인이 촉발한 디지털 화폐 전쟁

서클의 히스 타버트 총괄사장이 지난 21일 한국을 찾았다. 한데 이름도 낯선 서클이라는 기업의 사장이 이틀간의 짧은 방한 일정 중 만난 인물을 보면 놀랍다. 타버트 사장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를 비롯해 진옥동 신한금융지주 회장, 이호성 하나은행장, 정진완 우리은행장, 이창권 KB금융지주 부회장, 정태영 현대카드 부회장 등 금융권 인사와 주요 가상자산거래소 임원 그리고 정부 관계자를 만났다. 경제 매체들은 일제히 타버트 사장 인터뷰를 대서특필했다.
서클은 스테이블코인 USDC의 발행사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로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지난 6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됐다. 타버트 사장은 도널드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재무부 차관보를 지낸 관료 출신으로 서클 2인자다. 그가 한국에서 ‘국빈급 환대’를 받은 이유는 스테이블코인 때문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화폐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파급력을 갖고 있다. ‘1코인=1달러’ 식으로 가치가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의 작동 원리는 간단하다. 사용자가 발행사에 1달러를 입금하면 발행사는 1달러를 은행 계좌에 넣고 1스테이블코인을 사용자에게 전달한다. 반대로 사용자가 1스테이블코인을 발행사에 반환하면, 발행사는 해당 코인을 소각하고 1달러를 사용자에게 돌려준다. 1대1 교환 비율을 통해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는 1달러에 가깝게 유지된다. 이 모델의 핵심은 ‘준비금’이다. 발행사는 사용자들이 언제든지 상환을 요구할 것에 대비해 발행량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 자산을 준비금으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국가 간 결제 및 송금, 디지털 상거래, 기업 간 거래 등에서 스테이블코인은 기존 시스템보다 더 높은 효율성을 갖고 있다. 전통적인 국제 결제는 며칠이 걸리고 상당한 수수료가 발생하지만, 스테이블코인은 몇 초 안에 결제가 이뤄지고 수수료가 훨씬 적다. 지난해 스테이블코인 거래량은 27조6000억달러(약 3경8314조원)로 비자·마스터카드 거래량을 넘어섰다.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화폐 질서를 향해 각국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스테이블코인을 기회로 보고 있다. 현재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99%는 미국 달러에 가치를 연동하고 있다. 민간 기업이 유통하는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확장은 결국 달러 패권 강화와 연결되는 셈이다. 유럽연합(EU), 싱가포르, 홍콩, 일본 등은 관련 법률을 마련해 스테이블코인을 공식 금융 시스템에 편입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처럼 자국 통화 가치가 급락하고 물가가 치솟은 나라에서 스테이블코인이 지니는 가치는 남다르다. 이곳에선 세계 1위 스테이블코인 USDT가 법정화폐처럼 사용된다. 정부가 아무리 통제하려고 애써도 스마트폰과 인터넷만 있으면 누구나 디지털 달러를 보유하고 결제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스테이블코인이라는 신기술을 규제할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를 놓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반대하는 쪽에선 용도, 경제 효과가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세계경제학자대회에서 “자국 통화 스테이블코인이 도입되더라도 달러 스테이블코인 수요는 여전히 지속될 것”이라며 “자국 통화 스테이블코인은 오히려 달러 표시 가상자산과 맞교환을 촉진해 자본 유출 통로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준비하지 않으면 지금 원화 수요로 존재하던 것조차 달러 스테이블코인 수요로 넘어갈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통화 주권과 금융 질서 측면에서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 원화 스테이블코인 모두 우리에겐 낯선 단어다. 이 신기술은 국경, 중앙은행, 국가 발행이라는 기존 화폐 질서를 무너뜨린다. 정부가 발행하지도 않았고 중앙은행이 통제하지 않은 돈이 인터넷을 통해 국경을 넘나들며 사용된다. 각국 정부는 새로운 화폐 질서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민간을 활용하거나 규제를 만드는 방식으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10년 후 스테이블코인이 우리의 디지털 지갑 속에 있을지 아니면 거품처럼 사라질지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디지털 화폐 전쟁의 서막이 올랐고, 선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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