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특급에게 ‘장어’는 승리의 부적”…‘한만두’도 124승 발판일 뿐이라는 남다른 긍정 멘탈
어린시절 운동하는 셋째 아들에
어머니가 형제들 몰래 사준 장어
미국선 승리 이끈 행운의 부적
MLB 亞선수 최다 124승 기록
IMF 땐 국민들에게 희망 선사
“4할 타자도 못 칠 확률 더 높다”
생각의 전환이 빅리그 성공 비결

“소고기나 돼지고기에 비하면 기름기가 적어 장어를 찾지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있어서 더 애정이 가요. 어머니의 아낌 없는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음식이 장어예요.”
최근 암사역 인근의 암사민물장어에서 만난 박찬호는 장어 한 마리를 두고도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다운 입담을 식탁 위에 쏟아냈다.
이 가게의 단골손님이 된 이유는 맛은 기본이고 음식 하나하나에서 정성이 느껴져서다. 그는 “처음 방문한 건 2019년 5월이다. 내 고향 공주에서 멀지 않은 서천 출신 사장님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특별한 맛에 매료돼 한국에 올 때마다 자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무대를 누비던 시절에도 장어가 그리우면 일식당을 찾곤 했다. 미국에는 한국식 장어구이집이 없어 일식당에서 장어 초밥이나 덮밥을 주문해 먹었다.
“처음에는 보양식으로 챙겨 먹었던 장어가 어느날 승리를 부르는 행운의 부적이 됐어요. 한국에서 손님이 올 때마다 장어를 먹을 수 있는 일식당에 갔죠.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장어는 내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음식이에요.”
타국에서 고군분투하던 선수 시절에 장어로 몸보신을 했다면, 그의 마음은 국민들의 응원으로 채웠다. 한국팬들의 격려가 큰 힘으로 작용해 MLB 아시아 선수 최다승인 124승을 거뒀다.
“나와 만난 적도 없는 팬들이 언제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슬퍼해주는 것을 보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어요. 다양한 세대 팬들에게 ‘우리 아들’ ‘우리 형’ ‘우리 동생’과 같은 말을 들었을 때는 또 다른 가족이 생긴 것 같았죠. 나와 팬들은 한국이라는 한 팀이었고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어요.”

“처음에는 MLB라는 야구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느라 주변의 분위기를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새로운 무대에서 살아남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내 경기를 보고 수많은 사람이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팬들을 잘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지금까지 후회가 남는 한 가지가 있다. IMF 시절 국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지 못한 것이다.
“IMF 때 한국에 잠시 들어왔을 때 서울역 노숙자들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미국에서 한국이 힘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을 때는 이렇게 상황이 심각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죠. 1997년 소년소녀가장 등 힘든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어 재단을 설립했지만, 아직도 마음 한 곳에는 더 많은 분들을 챙기지 못했다는 미안함이 남아 있어요.”
이정후와 김혜성, 김하성, 추신수 등이 세계 최고의 프로야구 무대 MLB에서 활약하는 꿈을 갖게 한 롤모델이었던 박찬호는 자신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할까.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선수들을 10점 만점에 8점 이상이라고 생각했을 때 내 점수는 5~6점 정도인 것 같아요. 기록적으로만 본다면 이 점수가 맞죠. 하지만 최초의 한국 선수로서 수많은 아시아 선수에게 영감을 준 가치를 고려하면 만점을 줘도 아깝지 않다고 봐요. 제가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2~3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면 MLB에 도전하는 한국 선수가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련이 찾아왔을 때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눈앞에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거죠. 희망을 갖고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결과로 나타나게 됩니다.”
투수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로는 ‘생각의 전환’을 꼽았다.
“마운드에 서면 오만가지 생각이 듭니다. 공을 던질 때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데 타석에서 이대호, 이승엽 같은 타자가 있으면 머릿속은 더욱 복잡해지죠. 수많은 홈런과 안타를 맞으면서 깨달은 건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공을 치지 못할 확률이 60%가 넘는다는 것입니다. 3할 타자를 반대로 생각하면 10번 중 7번은 범타로 물러난다는 의미인데 이것을 깨닫게 된 뒤 투구에 앞서 편안함을 느끼게 됐어요.”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바꿔나가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내가 정의한 실패는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계속 거듭되는 겁니다. 반대로 성공은 안되는 이유를 발견해 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해요. 실패를 성공으로 발전시키다 보면 인간으로서 자연스럽게 성숙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패를 통해 얻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다. 1999년 한 이닝에서 한 타자에게 만루 홈런을 두 번이나 맞아 ‘한만두’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그는 실수와 시련, 외로움 등을 하늘이 준 특별한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만두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경기 운영 등에 대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처럼 실패를 하고 난 뒤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난 안돼’가 아닌 ‘아하 이거구나’라는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패를 ‘내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켜주는 행운’으로 받아들이면 자신도 모르게 한 단계 성장해 있을 겁니다.”
최근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한국프로야구(KBO)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볼까. 올해 사상 처음으로 전반기 관중 750만명을 돌파한 KBO리그는 지난해의 1000만명을 훌쩍 뛰어넘는 1200만명을 기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박찬호는 한국프로야구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현재 인기에 취하지 말고 시스템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조언했다.
“KBO리그가 예년보다 더 많은 관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야구 경기 자체가 아닌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 덕분이에요. ‘최강야구’와 같은 예능과 K팝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응원의 영향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흥행했을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죠. 한국프로야구가 오랜 기간 사랑받기 위해서는 BTS처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선수들을 배출해야 해요. 동시에 KBO리그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않도록 발전을 거듭해야 합니다.”

“현역 시절에는 혹시라도 다칠까봐 골프를 멀리했어요. 은퇴를 한 뒤에도 골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몇 차례 라운드를 하면서 내 안의 열정이 불타올랐습니다. 혼자서 고독한 싸움을 하는 투수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점점 더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다른 골프를 잘하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연습하고 있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세 딸과 아내의 사진을 자주 올리는 그는 가족의 소중함을 강조했다.
“가족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서로에 대한 존중이 없으면 안 됩니다. 넘버원 의리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데 세 딸들에게 내가 야구를 하며 배웠던 배려, 희생, 인내 등을 알려주려고 정말 많이 노력했습니다.”
지금 당장 마운드에 올라도 될 정도로 탄탄한 몸에 단단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신체와 정신 모두의 건강을 지킨 비결로 명상을 꼽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하고 있는 명상이 내게는 엄청난 도움이 됐습니다. 하루에 한 번이라도 잠시 뇌가 쉴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며 몸에 좋지 않은 습관들을 하나씩 없애려고도 노력하고 있어요.”
지난 6월에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스페셜 DJ로 변신했다. 야구, 골프 외 분야에서도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그의 다음 도전은 무엇일까.
“아직도 해보고 싶은 게 많아요. 그중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건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이죠. 여기에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미련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이어나가는 박찬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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