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학수의 골프 오디세이 <239> AIG 여자오픈서 링크스의 정수 보여준 로열 포스콜] 바람 불면 야수 돌변…‘가시 품은 장미’

올해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AIG 여자오픈에서 공동 4위를 한 김아림은 “샷을 할 때마다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선택의 연속이어서 머리에 쥐가 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일본의 야마시타 미유에게 밀려 우승을 놓친 그는 “트로피가 내 것인 줄 알았는데 가슴에 구멍이 났다”며 “다음에 같은 기회가 온다면 꼭 우승할 것”이라고 했다. LPGA투어에서 3승을 한 김아림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혼돈에 빠지게 한 건 바람과 거센 러프, 깊은 벙커, 단단하고 빠른 그린으로 중무장한 링크스 코스였다.
8월 17일 홍정민은 한국 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메디힐·한국일보 챔피언십에서 29언더파 259타로 KLPGA 72홀 최소타, 최다 언더파 신기록을 세우며 종전 기록인 23언더파 265타(김하늘·유해란·이정민)를 훌쩍 뛰어넘었다. 홍정민은 대회 코스인 포천의 몽베르 컨트리클럽에서 나흘 내내 다트 게임을 하듯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그린에 공을 세우고 날카로운 퍼팅으로 마무리해 무려 31개의 버디(보기 2개)를 잡아냈다. 이런 홍정민도 8월 초 AIG 여자오픈에서 1라운드 72타, 2라운드 79타로 중간 합계 7오버파를 기록하며 컷(2오버파)을 통과하지 못했다. 최근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와 메디힐·한국일보 챔피언십의 예선 통과 기준 스코어(컷)는 4언더파였다. 이틀간 중간 합계 3언더파를 친 선수도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국내 선수 기량이 발전해서 스코어가 좋아진 부분도 있겠지만, KLPGA투어 대회 코스가 선수의 기량을 골고루 테스트하기에는 변별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골프협회(USGA)는 코스 세팅의 원칙을 “14개의 클럽을 고루 사용할 수 있고 전략적인 경기 운영 능력을 갖춘 챔피언이 탄생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이 있다.

반전 매력 넘치는 ‘웨일스의 보석’
올해 AIG 여자오픈이 열린 영국 웨일스의 로열 포스콜(Royal Porthcawl) 골프 클럽은 올해 참가 선수를 비롯한 전문가의 찬사를 받았다.
넬리 코르다(미국)는 “코스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답지만 바람이 불면 매우 어려운 테스트를 하게 되는 곳”이라고 했다. 디오픈 챔피언십에서 다섯 차례 우승한 톰 왓슨(미국)은 이 코스를 찬미하며 이렇게 말했다. “골프장에 바라는 모든 것이 다 있다. 코스 배치가 마음에 들고, 쉬운 홀이단 하나도 없다. 처음 보는 순간 반해버렸다. 정말 훌륭한 시험 무대다.”
하지만 로열 포스콜은 빼어난 풍광과 변별력 높은 코스인데도 그동안 과소평가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최고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전 세계 골프 팬의 시선을 사로잡는 남자 골프 메이저 대회인 디오픈 챔피언십을 열기에는 교통 사정을 비롯한 인프라가 크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국 골프다이제스트는 웨일스 최고의 골프장이자 세계 30위권의 골프장으로 평가한다.

AIG 여자오픈이 열리기 전 방문한 로열 포스콜은 반전 매력 넘치는 ‘웨일스의 보석’이었다. 카디프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로열 포스콜은 시골 목장 분위기였다. 영국 왕실로부터 ‘로열(Royal)’ 칭호를 받은 골프장이지만 도대체 클럽하우스가 어디에 있을까 두리번거리게 한다. 영국과 미국의 유서 깊은 골프장의 클럽하우스는 한국처럼 으리으리한 곳은 없지만 그래도 멀리서 클럽하우스라는 느낌이 들게 하는 외관을 갖추고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클럽 사무총장인 존 에드워드의 안내를 받아 뒤편의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간 건물은 빨간 지붕을 한 단층 목조건물이었다. 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창문 바깥으로 대서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장관이었다. 라커룸에서는 양쪽으로 바다가 보였다. 로열 포스콜에선 겉모습에 속지 말아야 한다. 에드워드 사무총장은 “정확하게 측정한 것은 아니지만, 바다에서 가장 가까운 클럽하우스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했다.

로열 칭호 받은 ‘바람의 골프장’
로열 포스콜은 1891년 카디프 지역 사업가가 뜻을 모아 만든 9홀 코스로 출발했다. 1895년 말 골퍼의 발길이 늘면서 추가로 9홀을 증설했는데 북쪽으로 300야드 떨어졌다. 그 사이에는 한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근무했던 요양원이 있었다. 결국 북쪽의 9홀을 18홀 코스로 확장해 현재에 이르렀다. 1909년 에드워드 7세로부터 ‘로열’ 칭호를 받았다.
로열 포스콜의 클럽하우스는 1851년 런던의 하이드 파크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엑스포 당시 철골과 유리로 지은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의 유지 관리를 위해 투입된 엔지니어가 사무 공간으로 이용하던 임시 건물을 뜯어와 만든 것이라고 한다.
로열 포스콜은 ‘바람의 골프장’이다. 링크스 코스는 대부분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골프장 안쪽에 클럽하우스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바다를 향해 나갔다가 다시 클럽하우스 쪽으로 돌아오는 왕복형(Out-and-Back) 링크스가 많다. 바람 방향이 9홀씩 일정한 편이다.
로열 포스콜은 큰 모래 언덕(듄스)이 없어 모든 홀에서 바다가 보인다. 링크스 코스 중에도 최고의 바다 조망(sea view)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만큼 바람의 영향도 크게 받는다. KLPGA투어 경기위원장을 지낸 최진하 박사는 “로열 포스콜은 날카로운 가시를 품은 아름다운 장미”라고 했다. 직선으로 나갔다 돌아오는 코스가 아니라, 이리저리 꼬이고 뒤엉켜 홀마다 다른 바람을 마주한다. 122야드 파3 8번 홀은 로열 트룬의 시그니처인 ‘우표(postage stamp)’란 별칭이 붙은 8번 홀(파3)에 비교되지만 바람이 불면 가장 어려운 홀 중 하나로 돌변한다. 공이 여섯 벙커를 피해 그린에 떨어지길 기도해야 한다.
1995년 워커컵(영국·아일랜드와 미국의 아마추어 골프 대항전)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던 타이거 우즈는 매치플레이에서 OB를 내는 등 로열 포스콜의 가시에 깊은 상처를 입고 영국 선수에게 경기를 내주었다. 시니어 오픈 챔피언십이 세 차례 열렸는데 바람에 따라 스코어가 크게 출렁였다.
베른하르트 랑거(독일)는 2014년 로열 포스콜에서 열린 시니어 오픈에서 우승할 때 18언더파 266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2017년 같은 곳에서 4언더파 280타로 우승했다. 악천후 속에 열렸던 2023년 대회에서는 알렉스 체카(독일)가 5오버파 289타를 기록한 뒤 연장에서 우승했다.
3·4라운드에 바람이 불긴 했지만 비교적 온화한 날씨에 열린 올해 AIG 여자오픈에서는 11언더파 277타를 기록한 야마시타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아름다운 풍광과 다양한 수준의 변별력 있는 테스트가 이뤄지면서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웨일스에서 열린 가장 큰 여성 이벤트로 기록된 이번 대회에 4만7000여 명의 관중이 몰리고 전년 대비 유튜브 조회 수 144% 증가, TV 시청 시간 93% 증가, 소셜미디어(SNS) 팔로어 수 316% 증가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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