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에 첫 장편 감독… 영화의 종말? ‘좋은 작품’은 관객이 찾기 마련”[데스크가 만난 사람]
‘부산국제영화제의 아버지’ 김동호 前 위원장
Q.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영화의 미래는?
올핸 감독으로서 영화제 초청돼
작은 영화관의 소소한 사연 담아
영화의 의미·위기에 대한 이야기
쇼트폼 시대… 장편영화 설곳 잃어
매체 형태만 다를뿐 속성은 같아
위원장 일할땐 술과 뗄 수 없어
2006년 70세 새해첫날 금주후
20년간 술은 한잔도 입에 안대

어느덧 30주년을 맞이한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오는 9월 17일부터 26일까지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개최된다. 한국 영화 위기론이 팽배한 상황에서 30주년이란 타이틀의 무게감이 벅차지만, 그래도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최대의 국제영화제임을 의심할 수 없다. 올해에도 전 세계 241편의 초청작이 관객을 기다린다. 또 지아장커, 차이밍량, 기예르모 델 토로 등 거장들과 와타나베 겐, 양가휘, 계륜미 등 스타 배우들이 참석한다. 그러나 국내 팬들에겐 무엇보다 낯익고 유난히 친근한 이름의 한 사람이 눈에 띌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아버지’ 김동호 전 집행·조직위원장이다. 김 전 위원장의 이번 부산 방문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르다.
이번엔 공로상이나 특별상 수상자로 찾는 게 아니다. 그가 직접 쓰고, 섭외하고, 촬영한 장편 다큐멘터리 ‘미스터 김, 영화관에 가다’의 감독 자격으로 초청됐다. 지난 26일 ‘김 감독’을 경기 광주시 자택 ‘청하재(靑霞齋)’에서 만났다. 입이 떡 벌어지는 팔당호 전망을 품은 ‘명당’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영화계에서 말로만 들었는데 이곳 풍광이 대단하네요. 청하재는 어떻게 지은 이름인가요?
“푸를 청, 노을 하, 푸른 노을이라는 뜻인데요. 은둔하는 선비를 의미합니다. 제가 고교 시절에 자작한 아호(雅號)예요. 하하. 그때는 한시 같은 걸 좋아해서 제멋에 지은 것이죠.”
청하재는 드넓은 팔당호를 파노라마 뷰로 바라보고 서 있다. 총 4층으로 1·2층엔 식당과 카페가 입주해 있고, 김 전 위원장은 3·4층에 거주한다. 특히 3층은 서재와 응접실로 구성돼 있다. 각종 서적과 자료가 가지런히 장식돼 있어 마치 작은 도서관 같다. 9년 전 서울 집을 정리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단다.

―여기 전망은 나무랄 데 없이 좋은데요. 하지만 바깥일 보러 다니시기엔 불편하지 않으신가요.
“감사하게도 아직도 외부 일정이 없는 날이 없어요. 덕분에 거의 매일 서울을 오가야 하죠. 그러나 잘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직접 운전을 하기도 하고, 아니면 지하철역이 있는 곳까지 택시를 타고 나간 후에 이동하기도 합니다. 무릎 관절이 좀 안 좋아져서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지만 아직 문제없습니다.”
1937년생인 김 전 위원장은 지난 6일 생일을 지나면서 미수(米壽·88세)를 맞았다. 그러나 무릎 관절이 불편해지고, 청력이 좀 떨어진 것 외에는 건강에 이상이 없다. 단신이지만 타고난 체력과 2년 전까지 꾸준히 즐긴 테니스로 건강을 관리해왔다. 영화계에서 술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애주가였으나 이마저도 70세가 되던 2006년 1월 1일 딱 끊었다.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으로 활동하실 때 뵈었던 때가 기억납니다. 너무나 정력적으로 활동하셨고,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셨죠. 그래서 퀵 서비스 오토바이로 이동하고, 점심 약속을 3차례나 하며, 친목을 위한 술자리에 빠지지 않으셨었는데요. 술을 끊어서 섭섭하진 않으신가요.
“많이 마셨었죠. 공직 생활을 하면서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지을 때였어요. 인근 마을 주민 모두를 마을회관에 모시고 사업을 설명하면서 협조를 구했어요. 그때 돼지고기 안주에 100여 명과 소주를 주고받았는데, 그러고는 집에 돌아가 샤워하니 술이 깨더라고요. 하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김 전 위원장과 술에 대한 에피소드는 무궁무진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부산국제영화제의 명소처럼 여겨지던 해운대 포장마차촌에서 거의 밤을 지새우다시피 하며 국내외 게스트들과 만남을 가졌던 일화, 그래서 타고난 포용력과 친화력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술로 제패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술과 김 전 위원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금주 이후 지금까지 술 한 잔도 입에 댄 적이 없다. 서재에는 해외 영화제를 다니면서 구해온 양주와 포도주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젠 전시용일 뿐이다. 그는 “가끔 찾아오는 영화계 관계자들에게 선물로 하나씩 주는 데 사용한다”고 말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처음부터 15년을 함께한 레전드, 그 시작은 결코 쉽지 않았던 걸로 압니다만.

“30년 넘게 공직 생활을 하다가 물러나 있는데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어요. 1995년 8월입니다. 부산의 영화인인 이용관(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전양준(전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김지석(전 부산국제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이 ‘작지만 권위 있는 영화제’를 만들고 싶다면서 도와달라고 했죠.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사장을 하면서 영화에 눈을 떴고, 영화제가 그 나라의 영화를 해외에 소개하고 교류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에 공감했어요. 개인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고요. ‘패가망신’한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일단 하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그해 8월부터 12월까지 거의 날마다 부산에 가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1996년 9월 마침내 제1회 BIFF가 시작된 겁니다.”
―이 사연은 다시 들어도 참 대단합니다. 그런 역경을 뚫고 영화제를 추진하면서 언제부터 성공을 예감하셨나요.
“저는 1회 영화제가 끝나고 나서 곧바로 ‘아, 이 영화제는 성공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에 해외에 있는 영화계 VIP들을 다 친구로 삼아서 게스트로 초청했고, 그다음 해에도 방문 약속을 받았으니까요. 3회가 되면서부터는 영화 마켓까지 병행하면서 어느 정도 확신도 갖게 됐습니다. 물론 운도 좋았던 것 같아요. 영화제를 1996년 창설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때가 한국 영화 황금기의 도입부였어요.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김기덕 감독의 ‘악어’,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가 전부 그해에 나왔고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널리 알려졌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1990년대 영화,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도 그즈음에 나온 작품들입니다.”
―그래도 부산국제영화제 15년간 가장 힘들었던 일을 꼽자면 뭐가 있을까요.
“돈 구하러 다니는 일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1회 개최를 위해 필요한 예산이 22억 원인데 당시 영화제 동안의 극장 수입은 4억 원 정도로 예상됐어요. 터무니없었죠. 정부의 지원이나 기업의 도움이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부산의 정무부시장을 만났는데 결국 3억 원밖에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부터 제가 발로 뛰었습니다. 우선 고교 동창인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을 만나 간절히 부탁해서 3년간 매해 3억 원을 약속받았고요. 역시 고교 동문이자 배우 정윤희 씨의 남편인 조규영 중앙산업 회장에게 1억 원,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에게 1억 원, 대학 1년 후배였던 손경식 제일제당 회장에게 1억 원, 부산 중소기업 대표 8명이 각 2500만 원씩 총 2억 원, 그런 식으로 한 푼 두 푼 모아서 영화제를 치를 수 있었어요. 제가 은퇴하던 2010년에는 부산시의 지원금이 60억 원으로 불어나 있었죠.”
―격세지감입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엔 첫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들고 가신다고요.
김 전 위원장은 2013년 단편영화 ‘주리’(Jury)로 감독 데뷔한 적이 있다. 영화제 심사 과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작품. 배우 안성기, 강수연, 임권택 감독 등이 출연했다. 지난해에는 김량 감독이 김 전 위원장의 삶을 조명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청년, 동호’로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직접 찍은 장편 다큐멘터리는 이번이 처음이다.
“제목은 ‘미스터 김, 영화관에 가다’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코리아타운 ‘알윤’의 사연을 이희수 문화인류학 교수에게서 듣고 ‘내가 다큐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코로나19가 발발하는 바람에 방향을 좀 틀었죠. ‘그럼 작은 영화관을 찾아다니며 사연을 담아보자.’ 그래서 2022년에 캠코더를 구입해서 찍기 시작했어요. 해외로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대만, 일본 등의 소극장을 취재했고, 서울·대전·강원·광주 등 국내 40여 곳을 카메라에 담았어요. 박찬욱·봉준호·이창동 감독 등 인터뷰한 사람들만 약 100명 됩니다. 영화관의 의미와 미래, 영화계의 위기 등에 대해서 인터뷰했어요. 처음 1년은 혼자 찍었는데 차츰 알려지면서 사나이픽처스에서 공동 제작하게 됐어요. 9월 18일과 20일 부산에서 최초 상영합니다.”
―장편 감독 데뷔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런데 진짜 요즘 한국 영화계에 걱정이 많습니다. 미디어 환경이 쇼트폼 중심으로 급변하고 갈수록 투자는 줄어 장편영화가 설 자리가 없어 보입니다. 해법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제 다큐의 주제도 그거였는데요. 결국 공통적인 생각은 ‘그래도 좋은 영화를 만들면 관객은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세계 영화사에서 그간 이 같은 논의가 두 차례 정도 있었는데요. 한번은 1982년 빔 벤더스 감독이 프랑스 칸에 가서 호텔 666호실을 빌린 후 그곳에서 칸을 방문한 영화인들을 인터뷰한 게 있어요. 스티븐 스필버그, 장뤼크 고다르 같은 감독들에게 ‘텔레비전이 확산하고 있고 비디오 산업이 도약하는 상황에서 과연 영화 매체는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고, 그다음은 재작년 칸국제영화제에서 프랑스 감독들이 벤더스 감독을 오마주해 ‘룸 999’라는 제목으로 30명의 감독을 인터뷰한 것을 상영한 적이 있어요. 그때나 지금이나 고민하는 매체의 형태만 다를 뿐 속성은 매한가지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은 양질의 영화이고 작품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요즘도 영화제 일을 하신다고요.
“네, 올해로 7회째가 되는 대전특수영상영화제의 운영위원회 고문을 맡게 됐어요. 부산국제영화제 이후로도 제가 관여한 영화제가 많은데요. 이번엔 SF 분야에 특화된 영화제란 점에서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영화제를 주관하는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과 담당 과장님의 정성과 열의에 탄복해서 합류하게 됐어요.”
―오랫동안 왕성하게 활동하실 수 있는 건강의 비결은 뭔가요.
“무릎 때문에 2년 전에 중단했지만 오래도록 테니스를 했습니다. 이제는 아침마다 청하재 주변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한 바퀴 돌면 2000보 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아하는 일을 지금도 계속할 수 있어 행복한 거 같아요.”
■ 내 인생의 영화

인생 영화 3편을 꼽는다면
“한국 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1981년 작 ‘만다라’, 외화는 이탈리아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주연의 ‘인생은 아름다워’, 그리고 최근 본 영화 중에는 바둑 소재의 ‘승부’를 재미있게 봤습니다.”
김인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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