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그리움의 향기

신찬인 수필가 2025. 8. 28.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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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포럼

비가 내리고 있다. 아파트 쓰레기 적치장 한쪽에 피아노가 놓여 있다. 어제도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피아노다. 수거용 딱지가 붙지 않아서일까, 수거해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군가 가져가지도 않는다. 
 한때는 누군가의 손끝에서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을 피아노지만, 지금은 빗물에 젖어 있다. 왠지 안쓰러운 생각에 건반을 눌러 보았다. 여전히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난다. 그 소리는 마치 지나간 시간의 어딘가에서 다시 불러온 기억처럼 조용히 내 가슴에 울렸다. 
 피아노의 한쪽 귀퉁이에 '청주여자상고'라는 표시가 있다. 오래전 학교에서 사용했던 피아노를 이 동네 누군가 사용하다 내다 버린 듯싶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길게 딴 여고생들이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나이 들어가고 있을까. 모두 떠난 지 오래지만, 피아노에는 그 시절의 정겨운 웃음과 노래, 풋풋한 꿈이 묻어 있는 듯싶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명확한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절실한 상실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막연한, 하지만 가볍지 않은 설렘이다. 그건 아마 지금은 없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지 싶다.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감정이다. 그런 감정이 들 때면 가슴이 먹먹해졌다가 이내 따뜻해지곤 한다.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생각할 사람이 있고, 아름다운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봄 제주도에 있는 가파도에 갔었다. 남쪽 끝 망망대해의 수평선과 한 획을 그으며 낮게 떠 있는 섬이다. 봄바람에 청보리가 이리저리 휩쓸릴 때면 파도와 청보리가 구분되지 않았다. 따스한 봄 햇살을 등에 지고 푸르름이 가득한 해안 길을 걸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리움에 젖어 '마중'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그립다는 것은 오래전 잃어버린 향기가 아닐까. 사는 게 무언지 하무믓하니 그리워지는 날에는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노래의 가사처럼 그리움이라는 게 꼭 다시 만나야 하고, 진한 아픔을 감내하는 건 아닌 듯싶다. 그저 마음에 여유가 생길 때 잠시 다녀가는 향수병 같은 게 아닐까? 그렇게 한바탕 노래하고 나면 스르르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같은 감정이다.

 나는 종종 피아노를 연주한다. 혼자 있을 때면 고즈넉한 오솔길을 산책하듯 건반 위에 손을 얹고 선율에 빠져든다. 그러면 왠지 뒤숭숭하던 마음이 안정되고 메말랐던 감성도 촉촉해진다. 피아노는 어수선한 감정을 수습하기도 하고, 막연한 그리움에 젖게도 한다. 피아노를 칠 때면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오기도 하고 그리움에 젖어 행복해지기도 한다. 
 사람은 참 묘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지 않으면 될 것을 굳이 잊었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마음 시려한다. 어쩌면 인간이 인간다운 이유는 바로 그 이중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사라진 것들을 기억해 내고, 잊힌 걸 애써 그리워하며, 그 그리움 속에서 되레 행복을 찾는 존재, 바보 같지만 아름다운 모순이다. 헤어질 것이 두려워 사랑하지 못하고, 그리움이 아파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게 진정한 바보일 테니까.

 한참을 피아노 앞에 서서 생각에 젖었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오래된 가락처럼 친근하다. 피아노 위로 빗방울이 튄다. 버려진 피아노는 해체되어 어딘가 매립되고 소각될 것이다. 하지만 그 소리와 향기는 누군가에게 여전히 남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연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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