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되살아난 분단문학의 문제작 ‘붉은 고래’ 증보·개정판 출간

곽성일 기자 2025. 8. 28. 14:33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포항 출신 허씨 삼형제 실화 바탕…분단이 개인과 가족의 삶을 뒤흔든 기록문학
런던·베를린 여행 서사와 교차하며, 분단 80년 앞둔 오늘의 시대에 다시 묻는 질문
붉은 고래
이대환 작가(67)의 장편소설 '붉은 고래'가 20년 만에 증보·개정판으로 출간됐다.

2004년 3권으로 처음 세상에 나온 뒤 '분단문학의 문제작'으로 불렸던 이 작품은, 2023년 인터넷 문학매체 문학뉴스에서 '다시 읽는 문제작'으로 연재되며 재조명된 바 있다. 이번 단행본은 추가 장면과 개정된 문장을 더해, 760쪽 한 권에 묶인 두툼한 형태로 독자를 다시 찾는다.

▲분단의 격랑 속 허씨 삼형제

'붉은 고래'는 포항 출신 허씨 삼형제의 실화를 토대로 한다. 세 형제가 걸어간 서로 다른 길은 해방 이후 한반도의 정치와 이념, 분단의 질곡을 압축한다.

첫째 허경민은 가족을 북녘으로 보낸 뒤 일본에서 조총련 간부로 활동했다. 그는 민족과 사회주의를 붙잡으며 '북녘 조국'을 택한 세대의 전형이다. 그의 선택은 고향과의 영원한 이별을 의미했지만, 동시에 분단 이후 수많은 재일조선인의 삶과도 겹친다.

둘째 허경윤은 1980년대 초반, 남한의 권력 핵심부에 몸담았다. 군사정권 시절의 권력 구조 속에서 그는 체제의 질서와 국가 권위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치가 돈과 음모로 굴러가는 현실을 넘어, "정치의 본질을 새로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인물로 그려진다. 남한 권력의 정점에 섰던 그의 모습은 청년 세대가 겪었던 '순응과 변혁 사이의 갈등'을 압축한다.

막내 허경욱의 삶은 가장 극적이다. 일본으로 밀항해 큰형을 만나고 동해 바다를 종단으로 관통하고는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

오랜 감옥살이와 가석방을 거친 그는 분단 체제의 희생자이자, 동시에 끝내 이상을 놓지 않았던 치열한 청춘의 상징이다.

세 형제가 걸은 길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의 운명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된다. "분단의 현실 앞에서, 청춘은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는가."

▲날줄과 씨줄로 엮은 서사 구조

작품의 형식 또한 독특하다. 소설은 21세기 초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시작된다. 막내 허경욱이 조카 허시우(허경윤의 아들)를 만나 함께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틈틈이 삼형제의 삶과 가족사를 들려주는 구조다.

여행길은 씨줄이 되고, 삼형제의 실제 가족사는 날줄이 된다. 두 축이 교차하며, 한 가족의 서사가 곧 한반도 분단사로 확장된다. 종착지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허경욱은 그곳에서 북한 외교관이 된 큰형의 아들을 만나려는 불확실한 약속을 품는다. 베를린이라는 공간은 분단과 통일의 상징으로,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를 더욱 선명히 한다.

▲'오래된 비밀들'과 내면의 진술

소설 후반부에는 허경욱의 '오래된 비밀'이 등장한다. 평양 라디오에서 고향 친구의 목소리를 들었던 순간, 김일성과 대면해 잉어찜을 대접받던 자리, 황해도 제철소 화장실에서 '위대한 초상' 밑을 기어오르던 구더기를 바라보던 장면 등은 분단 체제의 기괴한 아이러니를 압축한다.

허경욱은 감옥에서의 최후 진술을 통해, 현실의 법정에 의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인물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세상'을 향한 내면의 법정을 스스로 열어젖힌다. 이 장면에서 작가는 주인공을 단순한 희생자가 아닌, 치열한 사상적 탐구자로 소환한다.

△다시 출간된 이유

이대환 작가는 서문에서 "광복의 햇빛은 어둠을 걷어내야 하지만, 분단의 어둠은 여전히 드리워져 있다"며 "멍투성이가 된 '붉은 고래'의 영혼에 이 책을 바치며, 경계 없는 바다를 유영하는 날을 기원한다"고 적었다.

20년 만의 재출간은 단순히 옛 작품의 재현이 아니다. 초판에서 미처 담지 못했던 장면들이 보강되었고, 언어와 문장이 오늘의 독자에게 다가설 수 있도록 다듬어졌다. 특히 분단 80년을 목전에 둔 지금, 이 작품은 개인의 비극을 넘어 집단의 역사를 묻는 문학적 기록으로 의미를 갖는다.

▲문학적·역사적 의미

'붉은 고래'는 분단문학의 계보 속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한다. 많은 분단소설이 남과 북의 대립 구도를 전면에 내세웠다면, 이 작품은 한 가족의 세 형제를 통해 분단이 개인의 삶과 사상의 여정을 어떻게 파괴하고 변형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여행 서사의 형식을 빌려, 과거와 현재, 동아시아와 유럽을 가로지르며 분단의 문제를 보편적 인류사의 차원으로 확장한다. 베를린 장면은 그 대표적 예다.

▲ 작가의 궤적

1958년 포항 출생인 이대환은 1980년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장편소설 공모에 당선돼 등단했다. 이후 '말뚝이의 그림자', '겨울의 집', '슬로우 불릿', '총구에 핀 꽃' 등 현실과 역사의 경계에서 문제의식을 던지는 작품을 써왔다. '박태준 평전', '한흑구 아리아'등 평전과 산문을 통해서도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탐구해온 그는, 이번 '붉은 고래'개정판으로 다시 한 번 분단문학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붉은 고래'는 허씨 삼형제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다. 그것은 해방 이후 이 땅을 살아낸 모든 청춘의 초상이자, 분단 80년을 앞둔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붉은 고래를 가슴에 품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