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양림동이 근대 건축의 산실로 불리는 이유

정유철 기자 2025. 8. 28.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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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유진벨·오웬 등 선교사 유입 계기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지 거론 등 재조명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입구에 설립된 양림마을이야기관. 광주 남구청 제공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은 1900년대 초 미국 선교사들이 정착해 학교, 병원, 교회를 세우면서 서양식 근대 건축과 지역 전통이 어우러진 곳이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은 양림동을 '근현대 광주'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최근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후보지로도 거론되며 그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27일 오후 찾은 양림동에는 빨간 벽돌로 지어진 교회 건물과 함께, 곳곳에 들어선 카페와 빵집, 식당이 눈에 띈다. '역사문화마을'이라는 대형 안내판, 정돈된 도로와 공영주차장, 골목마다 설치된 문화지도는 이곳이 관광지로 기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양림동은 지난 2009년부터 '양림동 역사문화마을 관광자원화 사업'을 진행했다. 총 560억원이 투입돼 1·2·3단계 사업이 추진됐다. 관광객 유입을 위한 거점예술여행센터와 사이트 개설, 도로를 비롯한 인프라 조성, 기념관 설립 등 많은 역사관광 사업이 병행됐다.
조선 개화기 초기 근대 광주의 문화전당이었던 오웬기념각.

근대 선교사들 왜 광주 양림동에 정착했나?
광주 양림동의 서양 선교사들의 유입은 조선의 1800년대 말 기독교가 유입됐던 역사와 함께한다. 

최초 성서 한글 번역자이자 일본수신사 수행원인 전남 곡성 출신의 이수정이 기독교를 조선에 전파한 것이 계기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을 설립한 것으로 잘 알려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1859~1916)에 이어 많은 선교사들이 지역 곳곳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여파로 광주에도 기독교 확산과 근대화가 이뤄졌다. 미국 선교사인 배유지(유진벨, 1868~1925)와 의사인 오웬(1867~1909)이 양림동에 정착한 것이다.

1895년 서울에 먼저 도착한 두 사람은 남부지방인 전주와 군산, 목포를 거쳐 1904년 내륙인 광주에 도착했다. 당시 나주에 설치하려고 했던 전남도청이 나주 유림의 반대로 광주에 설치되며 광주가 행정 중심지로 부상한 것이 정착의 주 이유였다. 이곳에 살기로 결심한 두 선교사는 양림동 일대 5만6000평의 부지를 구입했다. 당시 양림동은 산비탈과 하천변을 끼고 한센병 환자와 빈민이 모여 살던 척박한 땅이었다.

이들은 광주에 정착한 뒤 교육과 의료 활동에 힘을 쏟았다. 배유지는 숭일학교와 수피아여고를 세워 남녀 학생들에게 근대식 교육을 펼쳤다. 의사였던 오웬은 제중원이라는 진료소를 운영하며 병을 돌보며 선교를 병행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남긴 학교와 병원, 교회 건물은 훗날 양림동을 '역사문화마을'로 형성하는 토대가 됐다. 당시 산에 불과했던 양림동은 이후 서양식 근대 건축과 지역 전통 가옥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성장하며 광주의 근대사를 증언하는 현장이 됐다.

광주 남구 양림역사문화마을 이영례 해설사는 "양림동은 1904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과 의사였던 오웬이 5만6000평 부지를 매입해 정착하면서 광주 근대 건축과 교육·의료의 출발지가 됐다"고 설명했다.
광주서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인 우일선선교사사택.

광주 근대건축의 산실 이유는?
광주 남구 양림동이 '근대건축의 산실'이라 불리는 데는 뚜렷한 이유가 있다.

1904년 선교사 정착으로 시작된 서양식 건축의 밀집, 재단 중심의 소유 구조, 학교·병원·교회가 얽힌 기능적 역할, 그리고 보존 체계가 쌓여 오늘날의 모습을 지켜냈다.

시작의 주된 인물은 앞서 소개한 오웬·유진벨 선교사들이다. 이들은 양림동에 들어서며 토지를 매입하고 선교 거점을 세운 뒤 주거와 예배, 교육, 의료 시설을 설립했다. 이로 인해 단순한 건물 집합이 아닌 생활과 문화를 아우르는 '건축 생태계'가 형성됐다.

양림동이 다른 지역과 달리 건축 유산을 지켜낼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재단 소유 구조가 있다. 주요 건물들이 개인이 아닌 교단·학교 재단 소유로 관리돼 왔기 때문에 매각이나 재개발 압력에서 자유로웠다. 여기에 수피아중·고, 호남신학대학교, 광주기독병원, 양림교회 등이 같은 생활권에서 긴밀히 연결돼 건물이 실제로 '쓰이는 공간'으로 남았다는 점도 보존의 주된 이유다.

시간이 흐르며 문화재 지정에 따른 맞춤형 건물 보존 체계가 갖춰진 것도 큰 역할을 했다. 지속적으로 유지·보수를 위한 수리가 이뤄진 것이다.

특히 1910년 지어졌다 화재로 소실돼 1920년 증축된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서양 주택인 우일선선교사주택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 건물은 네덜란드식 설계와 당시 계림동에 모여 살던 중국인 기술자의 벽돌 생산 방식이 결합돼 '광주식 근대'라는 독창적 건축을 보여준다.

20년 가까이 양림동 주민이자 해설사로 활동해온 김동원씨는 "양림동은 단순한 동네가 아니라 근대 문화 역사의 현장이다. 선교사들이 들어와 서양식 건축을 시작하면서 광주 근대건축의 출발점이 됐다"며 "많은 건물들이 당시 시대상을 반영한 독특한 건축양식 덕분에 지금까지도 연구 가치가 크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