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스텝 꼬이는 민주당 ‘금산분리’ 강령
‘삼성·현대차코인’ 쓸모 있을 텐데
기업 스테이블코인 허용하려면
민주당 ‘금산분리 원칙’부터 바꿔야
17세기 말 영국 런던은 현대적 금융 제도가 태어난 ‘금융 혁신’의 산실이었다. 민간 사업가들이 정부 재정을 대려고 만든 잉글랜드은행이 대표적이다. 영국은 1688년 명예혁명으로 의회 동의 없이 국왕 마음대로 세금을 올릴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윌리엄 3세는 프랑스와 전쟁에서 해군 함대를 강화할 돈이 필요했다. 그때 민간에서 120만 파운드를 자본금으로 모아 1694년 잉글랜드은행을 세운 뒤 연 8% 이자만 받고 빌려 주면서 원금은 갚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신 지폐 발행을 허용해 달라고 했다. 이것이 영국 국가 부채의 효시다.
21세기 미국은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법제화하면서 17세기 영국의 아이디어를 빌렸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회사가 미국 국채를 담아 놓고 있는 대신 이를 기반으로 ‘1코인=1달러’ 식으로 안정적인 디지털 화폐인 스테이블코인을 내게 한다는 것이다. 늘어나는 국채를 민간 기업이 사실상 영구히 보관하고 반대급부로 화폐를 발행하는 식이어서 잉글랜드은행 설립을 떠올리게 한다.

경제학자들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는 ‘내로 뱅킹(narrow banking)’이란 은행 모델 중 하나와 다름없다는 평가도 한다. 내로 뱅킹은 고객 예금을 전액 국채 등으로 안전하게 쟁여 두고 대출은 하지 않는 은행을 가리킨다. 1930년대 대공황 때 금융 개혁 방안으로 어빙 피셔 예일대 교수와 일군의 시카고대 교수들이 ‘시카고 플랜’이라며 제기했다. 은행이 대출을 과도하게 늘려 위기를 촉발하는 걸 막기 위해 단순 결제 기능만 허용하자는 것이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내로 뱅킹 모델로 보면, 스테이블코인 발행은 좁은 의미의 은행을 허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기 때는 취약한 은행으로 예금을 찾으러 뛰어간다는 ‘뱅크런’과 비슷한 ‘코인런’ 우려가 나온다.
스테이블코인은 쓸모라는 측면에서도 따져볼 수 있다. 디지털 세상에서 국경을 넘나드는 거래 때 도움을 주는 효과는 분명해 보인다. 업계에선 IT(정보통신) 기업들이 내는 스테이블코인이 있다면 해외 한류 팬들이 K팝 굿즈 등을 쉽게 살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만난 한 금융권 고위 인사는 삼성전자, 현대차 등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스마트폰, 차 등을 팔 때 경쟁력을 크게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했다. 만약 현대차가 낸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차를 사면 몇 %를 깎아주겠다고 하면 외국 소비자 수요가 크게 늘고, 현대차로서도 환율 변동 위험을 줄일 수 있어 이득이 될 것이란 얘기다. 그렇다면 원화 스테이블코인 허용은 현대차 등에 ‘내로 뱅킹’식 은행을 세우게 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바뀐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유통 등 스테이블코인 활용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이어 민주당 의원들이 이를 제도화하는 법안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 장단점을 두고 논란이 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걸리는 게 하나 있다. 민주당 강령을 보면 ‘금산분리 원칙을 견지한다’고 돼 있다. 금산분리(金産分離)는 대기업이 은행 등 금융회사를 사금고화할 우려가 있어서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우리 정부도 그간 IT 기업에 예외를 두는 인터넷뱅크를 제외하고는 기업의 은행 소유를 제한하는 ‘은산분리’ 기조를 지키고 있다. 금산분리를 외치면서 기업이 디지털 화폐를 내고 ‘내로 뱅킹’ 은행업을 하는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할 수 있을까. 만약 이재명 정부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하고 싶다면, 먼저 민주당 강령에 있는 ‘금산분리 원칙’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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