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 ‘투쟁의 공간’ 인천서 현재도 명예회복 투쟁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 김용자

김용자(69·사진)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는 1956년 충남 청양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셋째인 김용자 대표의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도 차례로 인천 동구 만석동에 있는 동일방직 공장에 입사했다. 김용자 대표도 1973년 꽃다운 열일곱에 언니들을 따라 동일방직으로 들어갔다. 1960~1970년대 한국의 수출 1위를 차지한 섬유산업 등 경공업은 김 대표 같은 여성 노동자들이 떠받친 가운데 성장했다.
누구나 그랬던 그 시절 이야기였지만, 1970년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노동조합 투쟁이 시작되면서 그들의 이야기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아니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1976년 ‘나체 시위’, 1978년 ‘똥물 테러 사건’과 ‘명동성당 단식 농성’, 그리고 노조 조합원 124명에 대한 ‘해고’까지 김용자 대표는 동일방직 노조 투쟁 한가운데에 있었다.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 없다!” 1978년 9월 서울기독교회관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만든 연극 공연 ‘동일방직 문제를 해결하라’에서 1인 3역(국무총리, 사측 노조 파괴자, 여공)을 맡아 무대에 올라선 김용자 대표는 동료들과 이렇게 외쳤다가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로 인해 재취업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김용자 대표는 9차례의 해고를 감수하며 노동 현장을 지켰다. ‘똥물 테러’를 당한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사진은 노동운동사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사진 안에 갇히지 않고 지금까지도 명예 회복을 위한 투쟁을 진행 중이다. 옛 동일방직 노조의 막내뻘이었던 김용자 대표가 ‘현재 진행형’인 투쟁의 중심에 있다. 투쟁의 공간은 인천이었다. 김용자 대표가 “인천은 제2의 고향”이라고 하는 이유다. 오늘도 그는 옛 일터로 복직해 단 하루라도 일하길 바라고 있다.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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