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섬, 월미도] 3. “소유권 넘어가도 우리는 아무 말도 못 들어”

정슬기 기자 2025. 8. 27.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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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집으로 가는 길
미군 철수 후 軍…이후 인천시 소유
원주민 마을 자리 여전히 닫혀 있어
20여년 월미공원 정문서 귀향 투쟁
▲ 지난 20일 인천 중구 월미공원 전통정원에서 한인덕(80)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장이 인천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호윤 기자 256@incheonilbo.com

지난 20일 오후 2시쯤 인천 중구 북성동1가 월미공원 정문. '월미공원' 조형물에 가려진 뒤편에 판잣집 형태 구조물과 "월미도 원주민들에 대한 피해 보상과 귀향 대책을 수립하라"고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한인덕(80) 월미도 원주민 귀향대책위원장은 "20여년 전 월미공원을 만들 때 농성을 시작한 자리"라며 "국방부에서 인천시로 소유권이 넘어오는 과정에서도 고향에서 내쫓긴 우리에겐 아무 말이 없었다"고 말했다.

원주민들은 인천상륙작전이 휩쓸고 간 월미도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곧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월미도는 미군기지가 됐다. 섬 초입과 월미산에 군사시설이 들어섰고, 1953년 정전협정 이후에도 철조망은 걷히지 않았다. 하인천에서 월미도로 이어지는 둑길조차 민간인에겐 닫혀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군 철수 소식이 들려왔다. 1971년 미군은 월미도를 떠나면서 국방부에 부지를 인계했다. 잠시나마 귀향의 기대가 일었지만, 국방부는 해군을 주둔시키며 월미산 일대를 군사 구역으로 묶었다.

그 무렵 월미도는 거듭된 항만 개발을 거쳐 섬 아닌 섬으로 외형이 달라졌다. 1974년 인천항 갑문시설이 준공되면서 월미도는 내륙 일부가 됐다. 이때 생겨난 해안 매립지는 월미산 중심부와 달리 군사 작전 구역에 포함되지 않아 해안도로를 따라 시민들이 드나들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월미도 일부는 일반인에게 개방된 상태였다.

월미도는 다시 수도권 관광지로 주목받았다. 1989년 7월1일 인천시민의 날을 맞아 '문화의 거리'가 개장하면서 차량이 다니던 해안은 보행 공간으로 바뀌었다. 1992년에는 놀이공원이 문을 열었다. 관광객으로 붐비던 거리와 달리 월미산과 원주민 마을이 있던 지금의 월미공원 자리는 여전히 닫혀 있었다.

그 사이 월미산을 중심으로 주둔하던 해군 제2함대사령부 이전 논의가 본격화했다. 인천항 과밀과 보안 취약 문제가 불거지면서다. 월미도 군부대는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도 50년이 가까워진 1999년 11월에야 경기 평택으로 옮겨갔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지난 2008년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을 규명했던 김구현 전 조사관은 "폭격 이후 월미도가 군사기지가 되면서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왔던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귀향할 수 없는 피해를 겪었다"며 "국가와 지자체에 귀향 지원과 화해 조치를 권고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2001년 국방부가 부지를 인천시에 매각하면서 월미산은 시민에게 개방됐다. 철조망에 묶여 있던 자리는 둘레길과 전망대를 갖춘 월미공원으로 재탄생했지만, 원주민에게 고향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관련기사 : [돌아갈 수 없는 섬, 월미도] 3. 억압·시련에도…원주민 '귀향 열망' 꺾이지 않았다

/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이순민·이아진·변성원·정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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