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충의 마음 [똑똑! 한국사회]

한겨레 2025. 8. 27.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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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 방송작가·‘연중마감, 오늘도 씁니다’ 저자

“이번 주가 마지막 공연이거든요. 와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대학 강의로 만난 제자 승근이가 초대장을 보내왔다. 행운 같은 기회로 뮤지컬 배역을 맡았으니 꼭 보러 와달라는 부탁이다. 정보를 뒤져보니 아이돌 가수 여럿이 나오는데다 케이팝의 유행으로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많단다. 제자 덕에 눈 호강 좀 하겠구나 싶었다. 여기서 승근이가 맡은 배역은 주인공이 가르치는 12명의 학생 중 한명, 이를테면 단역 중의 단역이다. 무대 구석구석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찾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윽고 막이 오르고, 화려한 조명 아래 주연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주인공을 좋아한다. 단순하다 비웃어도 어쩔 수가 없다. 드라마 속 ‘서브 남주’에겐 마음 한켠 내주지 않는다. 아이돌 그룹의 무대도 리드보컬만 쳐다본다. 하다못해 삼국지를 읽을 때도 주인공 유비가 도망만 다니는 상황이 한없이 짜증스러웠다. 화려한 무대 정중앙에서 가장 크게 반짝이는 별, 주인공이란 나에게 그런 존재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좀 예외가 됐다. 무대 위에 오른 승근이를 어렵게 발견한 순간, 눈길은 묘하게 기특한 제자에게 고정됐다. 난생처음 주인공 아닌 단역에게 시선을 돌려본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조금씩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원래 단역이란 무대 뒤편에서 주인공을 비추는 조명 같은 역할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나무나 돌 같은 비중이다. 간혹 실수가 나오거나 멍하니 있더라도 들키지 않을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승근이는 한순간도 대충 하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주인공을 따라다닐 때도, 무대 한구석에서 들리지도 않는 대사를 벙긋대며 쉼 없이 연기를 이어갔다. 혹시라도 관객의 시선이 스칠지 모를 1초 혹은 0.5초를 위해 빚어낸 찰나의 순간이었다. 단역 한명 한명이 온 마음을 다해 몰두하는 순간 무대는 작은 반짝임으로 가득했고, 땀을 뻘뻘 흘리며 군무를 하는 승근이는 스스로 빛나는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찔끔거렸다. 초라하게 쭈그러든 마음 때문이다. 나의 첫 마음도 저랬을까? 기억을 더듬어갔다. 사회에 나와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 온 마음을 쏟아부은 시간이 있었다. 그땐 남들이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글로 밥벌이를 하게 된 순간 자체가 기뻤으니까. 하지만 언제부턴가 잃어버린 마음이 있다. 온 세상 관심을 한데 모으며 재능이 흘러넘치는 사람들 앞에선 까닭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일이든 글쓰기든 어차피 이번 생에서 주연이 되기는 글렀으니 필요 이상 힘쓰지 말자는 자기합리화다. 대신 ‘대충’의 마음이 자리 잡았다. 내가 이 정도면 됐지, 위안하며 손바닥을 탁탁 털어냈던 순간들이다. 그 대가로 일상은 평온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온전히 내 생의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김금희의 책 ‘경애의 마음’의 한 구절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두가 주인공일 수 없다. 유튜브에서 태권 찌르기를 하거나, 저녁 밥상 메뉴까지 공개하며 주인공이고자 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모두가 주인공일 필요도 없다. 다만 각자의 자리에서 진심을 다해 발을 구르면 그만이다. 결국 마음에 달렸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만큼 애쓰고 있는가. 비록 보잘것없을지라도 작은 무대 위에서 나는 주인공인가. 혹시 주연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을 대충 다독이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남몰래 울컥해진 공연장 한구석에는 한때 오롯이 주연이었으나 언제부턴가 단역에 만족하게 되어버린 초라한 내가 서 있었다. 순간순간 온 힘을 다해 반짝이는 승근이의 모습을 보면서 잃어버린 마음을 다시 꺼내어본다. 제자에게 배우는 어른의 마음이다. 비록 주인공이 아니어도 스스로 반짝이는 순간, 생은 충만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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