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58)] 47년째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김용자입니다

박경호 2025. 8. 27.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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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루 출근하더라도 내 손으로 사직서 쓰고 싶다” 일흔살 여공의 존엄 투쟁

김용자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 2025.8.2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하루를 출근하더라도 내 손으로 사직서를 쓰고 싶어요.”

‘아임 프롬 인천’ 58번째 손님으로 초대한 김용자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를 지난 22일 오후 경기도 고양 일산에서 만났다. 그에게 복직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이같이 답했다.

1978년 2월21일 인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공장에서 회사 측 구사대가 노동조합 대의원 투표에 참여하려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리고, 바르고, 먹인 이른바 ‘똥물 테러’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그 사진은 한국 노동운동사 그리고 여성노동운동사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그 사진이 워낙 유명한 탓에 동일방직 노조 투쟁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사진 속 장면에만 머물고 있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 사건 이전부터, 그 이후에도 수많은 투쟁이 이어졌다. 동일방직은 1978년 4월1일 조합원 124명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해고자 명단에는 김용자도 포함돼 있었다. 정부 당국과 어용노조는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의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에 배포해 이들의 밥줄마저 끊으려 했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복직 투쟁을 이어가다 각자의 삶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김용자와 일부 동료들은 또 다른 노동 현장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많은 이가 끝난 줄로만 알고 있던 동일방직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니 둘 이어 17살에 동일방직 입사
40℃ 실내 솜먼지 가득 공장서 3교대
노조탄압 맞서다 1978년 124명 해고
김수환 추기경 중재로 단식농성 중단

■ 열일곱에 입사한 만석동 방직공장

김용자는 1956년 1월 충남 청양의 한 농촌 가정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에 입사할 때 나이는 17살이었다. 친척 중 한 명이 가장 먼저 동일방직에 들어갔고, 그의 소개로 김용자의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가 차례로 동일방직에서 일하게 됐다. 셋째 김용자까지 들어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땐 시골에서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졸업하면 무조건 일터로 나오는 거였어요. 동일방직에 다닌 우리 세 자매는 만석동 조그마한 쪽방에서 자취했는데, 요 하나 깔면 두 명이 겨우 자는 방이었어요. 공장이 3교대로 돌아가고 세 자매가 1, 2, 3반으로 흩어져 있어서 방 하나로 살기가 가능했던 거죠.”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해마다 50만명씩 일자리를 구하러 대도시로 향했다. 인천지역 일자리 수 또한 1960년대 초 9만개에서 1970년대 말 23만개로 급증했다. 경공업 육성과 수출로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 초창기 수출 1위는 섬유산업이었다. 도시로 이주한 수많은 여성 노동자의 노동력, 즉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이룬 결과다.

“동일방직은 키가 155㎝ 이상 여성부터 뽑았어요. 저는 나이도 어리고 키도 안 됐는데, 공장에서 키가 자랐어요. 동일방직은 다른 공장보다 노동 시간(3교대 8시간)이 짧고 월급이 조금 셌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3개월 교육받고 꿈에 부풀어 현장에 투입됐는데 생지옥이더라고요. 실내 온도는 40℃에 솜먼지로 앞이 보이질 않았어요.”

김용자는 실뭉치에서 실을 뽑는 기계인 조방기에서 나온 실을 꼬아 가늘면서도 단단하게 만드는 공정인 ‘정방’에서 일했다. 앞치마에 넣은 스펀지로 얼굴에 붙은 솜 먼지를 계속 털어가며 실이 끊어지지 않는지 지켜봤다. 기계 수백 대가 돌아가는 소리 말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기계는 24시간 돌아갔다. 8시간 동안 일하면서 식사는 물론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쉴 때는 꽃다운 청춘답게 삼삼오오 모여 이곳저곳을 누볐다. 김용자는 여름이면 경기도 부천 송내에 있는 포도밭과 복숭아밭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온양상회나 충남상회, 똥물 테러 사진을 찍었던 우일사진관 등 만석동 공장 앞 풍경은 여전히 생생하다. 김용자는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가 제빵공장 등을 거쳐 1977년 동일방직에 재입사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두 언니는 이미 공장을 나왔고, 김용자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 노동권 가르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옛 인천도시산업선교회


1972년 여성 노동자가 대다수인 동일방직에서 첫 여성 노조 지부장에 주길자가 선출된 이후 회사와 사측 편에 선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 중심 노조 집행부를 견제하고 탄압했다. 당시 동일방직 노동자 1천300여명 중 여성이 1천명에 달했다. 김용자가 재입사하기 한 해 전인 1976년 7월 노조 탄압에 맞서 농성 중이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경찰력이 동원되자 옷을 벗어 ‘나체 시위’로 저항하다 연행되기도 했다. 이렇듯 노조 탄압의 강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언니들이랑 살 때는 집주인이 사측 편인 동일방직 직원이기도 했고, 노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어요. 기숙사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돈독하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조에 가게 됐어요. 조합원이 워낙 많아서 노조에서 조합원을 모두 교육시킬 수 없었는데, 그래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권 교육을 받았죠. 저는 노조보다 오히려 산업선교회 조화순(91) 목사님과 친해졌어요.”

1960~1970년대 노동 문제에 대해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종교인들이었다. 감리교 목사 조지 오글(George E. Ogle·1923~2020)은 1961년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초가집을 얻어 인천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이하 인천산선)로 명칭을 변경했다. 인천산선은 인천판유리, 대성목재, 동일방직, 인천부두 등 주요 사업장의 노동 현장으로 목사와 전도사를 보냈다. 이 가운데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들어가 일했다. 인천산선은 1960년대 중후반부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권 교육을 시작했다.

‘블랙리스트’ 올라… 취업·해고 반복
노동운동 이끈 인천도시산업선교회
해고되면 찾아… “한 많은 화도고개”
2000년 옛 동료 모아 복직 요구 시작
관련자 76명, 민주화운동 인정 받아
해직때 정부 개입 밝혀져 손배 승소

“살아있는 한 그만둘 수 없는 투쟁”

인천산선과 조화순 목사의 영향을 받은 김광자 등 여성 조합원 주도로 대의원 선거를 치렀다. 그러나 회사도, 정부 당국도 여성 노동자 주도 민주노조의 활발한 활동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사측은 지속해서 민주적 노조 선거를 방해했고, 결국 똥물 테러 사건이 터졌다.

“오후 2시 출근하는 반이어서 기숙사에서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복도로 막 뛰어오면서 ‘난리났다. 노조 사무실로 가보라’고 했어요.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방 식구들과 노조 사무실로 뛰어갔는데, 반대파(구사대)들이 막 조합원들에게 똥을 뿌리면서 때리고 있었어요. 그 현장에 경찰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거든요. 제가 경찰에게 좀 말려달라 도와달라고 했더니, ‘쌍년들아 이따 말릴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정말 충격받았어요.”

1978년 3월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 중이던 동일방직 노조 조합원들을 만난 김수환 추기경.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제공


동일방직 노조는 정부 당국, 사측과 어용노조가 합작한 탄압에 명동성당과 인천 답동성당에서 13일 동안 단식 농성으로 맞섰다. 김수환(1922~2009) 추기경 등 종교계 중재로 단식을 마무리했으나, 사측은 조합원 124명을 해고했다.

■ 블랙리스트로 인해 반복된 해고

인천 동구 화수동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앞에서 1980년대 후반 김용자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이 촬영한 사진.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제공


김용자는 해고 이후 기숙사에서 나온 동료들과 인천산선에서 지냈다. 섬유노조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전국 사업장에 배포하면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재취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복직 투쟁을 이어갔지만, 그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을 이뤄내지 못하고 흩어져야 했다.

김용자는 동일방직 이후에도 9번 해고당했다고 한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동일방직 해고자 출신인 것이 들통나면 재취업한 회사를 나가야 했다. 해고당하지 않을 직종이라고 생각한 것이 ‘버스 안내양’이었다. 김용자는 인천 제물포여객과 항도여객 등에서 버스 안내양으로 일했는데, 그 일터에서 겪은 부조리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당시 버스 안내양은 새벽 4~5시 첫차부터 일을 시작해 밤 1~2시에야 마칠 정도로 노동 시간이 길었다. 버스가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승객을 태운 탓에 안내양은 문을 연 채 매달려 있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안내양이 승객 요금 일부를 횡령해 버스 기사에게 상납해야 하는 악습도 있었다고 한다. 김용자는 두 차례 해고 후 선진여객에 세 번째로 입사해 동료들과 버스 안내양 노동 조건 개선을 사측에 요구했다.

“마지막으로 안내양을 한 회사에선 노동 조건을 일부 개선했지만, 그 현장 활동 때문에 경찰에 수배까지 됐었어요. 취업한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해고당하면 다시 인천산선으로, 또 취직했다가 해고당하면 인천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반복됐어요. 인천산선 갈 때 넘어가는 고개를 ‘한 많은 화도고개’라고 했어요. 그만큼 인천산선으로 돌아와 우는 날이 많았죠.”

■ 명예회복 위한 새로운 투쟁

2001년 인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인천공장을 찾아 복직을 요구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제공


그렇게 1980년대, 1990년대를 거쳐 김용자와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의 새로운 투쟁이 시작된다. 국가의 책임을 묻는 투쟁이었다. 1999년 말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진상규명특별법’이 제정됐다. 김용자, 석정남, 정명자, 최연봉 등 꾸준히 만나왔던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옛 해고 조합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동일방직 노조 투쟁의 명예를 회복할 때라고 생각했다.

“해고 조합원들을 20년 만에 어렵게 다시 모았어요. 2000년 9월 인천 만수동에 있는 복자수도원에서 첫 모임을 가졌고, 그날 부평 백운역 쪽에 있던 저희 집에서 1박을 하면서 민주화운동보상법의 명예회복 신청서를 작성했어요. 이듬해 11월 해고 노동자 중 76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해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로 ‘돌아온 동일방직 언니들’은 동일방직 인천공장 정문을 찾아 1978년 부당해고를 철회하고 원직에 복직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듬해에도, 2005년에도 만석동 동일방직 공장을 찾아 농성을 벌였다.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일방직 똥물 테러 사건 등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고 해고 조치를 지시했다며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를 토대로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는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다. 8년의 소송 끝에 2018년 법원은 국가가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했다.

“우리 가족들에게 비로소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떳떳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어요. 저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친정이에요. 지금도 만석동 동일방직 공장 주변을 답사하면 마음이 울컥합니다. 남은 건 복직이고, 그게 우리의 최종적인 명예 회복이에요. 제 나이가 이제 일흔이 다 됐고, 이젠 그만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살아있는 한 그만둘 수 없는 투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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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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