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명화산책] 20세기 최고의 지적 화가 클레의 ‘세네치오’

강현철 2025. 8. 27.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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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철 논설실장


스위스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파울 클레(Paul Klee, 1879~1940)엔 ‘20세기 최고의 지적(知的)인 화가’라는 별명이 뒤따른다. 작품을 위해 미술은 물론 음악, 수학, 식물학, 천문학, 화학은 물론 심지어 해부학까지 공부했다. 독일계 미국 화가인 라이오넬 파이닝거는 “클레는 깊은 현명함과 놀라운 지식을 갖춘 시간을 초월한 사람”이라고 했다.

파울 클레 ‘세네치오’. 1922년. 캔버스에 유채. 세로 40.5 × 가로 38cm. 바젤 시립미술관(Kunstmuseum) 소장.


‘현대 추상 회화의 시조’로도 불리는 클레는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와 함께 20세기를 빛낸 화가로 꼽힌다. ‘세네치오’(Senecio)는 클레의 대표작 중 하나다. 세네치오는 라틴어로 ‘늙은이’, ‘나이 든 사람’을 뜻한다.

‘세네치오’는 대담한 색상과 둥근 원안의 기하학적 모양으로, 마치 가면을 쓴 듯한 느낌의 초상화다. 보통의 초상화와는 달리 얼굴은 납작해지고 추상화됐다. 빨강의 두 눈동자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다. 클레는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기하학적으로 분해했다. 동그라미를 여섯 조각의 면으로 나누고 삼각형의 눈썹, 직사각형에 가까운 턱과 뺨, 이마 등에 다양한 색을 채워넣었다. 그 결과 민속 예술과 추상화의 요소가 혼합된 장난스럽고 세련된, 마치 음악처럼 리듬을 가진 초상화가 탄생했다.

자유로운 상상과 기하학적 순수 형태로 이루어진 조형 방식은 한국 근현대 화가 장욱진의 그림처럼 단순함에서 비롯되는 천진함을 보는 듯 하다. 평평한 형태, 굵은 선, 밝은 색조 등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한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대로 표현한 ‘세네치오’는 표현주의(Expressionism) 스타일을 보여준다.

클레의 그림은 △밝고 대담하며 혁신적인 색상 조합 △기하학적 모양과 패턴을 사용한 추상화적 경향 △음악, 문학, 점성학 등에서 가져온 다양한 기호와 텍스트의 활용 △어린 아이와 같은 장난스럽고 기발한 이미지 △음악의 영향 등이 특징이다.

파울 클레 ‘호프만 이야기’(Tale of Hoffmann). 1921년. 수채화. 40.3 x 32.1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그의 그림에는 동물, 식물, 사람 같은 형상이 보이는가 하면 추상적인 기호와 상징이 숨겨져 있기도 한다. 이집트 여행에서 느낀 상형문자, 피라미드의 이미지, 고대 문명의 신비함도 등장한다. 서정적인 시적·음악적 요소와 분석적·구조적인 건축학적인 요소가 공존한다.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의 기하학적 추상이나, 칸딘스키의 서정적 추상과는 다르다. 꿈을 꾸는 듯 몽환적이고 리드미컬해 신비적 추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명암과 채도를 달리하며 색 자체로 그림에 리듬과 생명을 불어넣는다.어릴 적부터 바이올린에 소질이 있던 그에게 음악과 미술은 다르지 않았다. 작곡과 회화의 근본은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클레는 그림은 음악처럼 내면을 드러내 조합하는 것으로 여겼다. 음악과 함께 그의 작품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여행이었다.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여행은 그의 감수성을 깨웠고, 작품 세계에 전환점을 가져왔다.

파울 클레 ‘추상 트리오’(Abstract trio). 1923년. 종이에 수채화 및 전사 인쇄 잉크. 47.9 x 64.5 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클레는 현대 추상화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색상과 형태, 선의 잠재력에 대한 탐구와 음악에 대한 관심이 추상화로 가는 길을 열었으며, 예술 이론에 대해 쓴 글 또한 현대 미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20년에 발표한 논문 ‘창조에 관한 신조’에서 클레는 “예술은 가시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되는 것”이라고 했다. 예술은 대상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상상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몽환과 논리, 음악과 기하학,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유아적인 단순함과 세련미 같은 상반되는 요소들은 그를 ‘대가’(大家)로 만들었다. 또한 클레는 세상의 모든 근원은 움직임에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예술적 목표는 움직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교 뮌헨부흐제에서 태어났다. 성악가이자 음악이론가인 아버지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는 성악가였다. 클레 또한 바이올린에 뛰어나 어릴 때부터 정기적인 연주회를 열고 베른음악협회 명예회원이 될 정도였다.

그런 그가 대학 입시를 앞두고 화가의 길로 돌아선 것은 보다 창조적인 일을 하고픈 욕망에서였다. 1900년 뮌헨의 미술학교에 입학한 클레는 상징주의의 대가 프란츠 폰 슈투크(Franz von Stuck)의 지도를 받았다. 슈투크는 클레의 친구인 러시아 출신 화가 칸딘스키의 스승이기도 하다. 클레는 초기 풍자 캐리커처, 판화, 선화, 드로잉을 주로 그렸으며, 특히 드로잉에 재능을 발휘했다. 바그너와 슈트라우스, 모차르트, 베토벤의 곡들과 이탈리아 오페라는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음악과 미술 두 영역을 융합하는 작업에 몰두했던 그는 마침내 그림 안에 음악을 담는 데 성공했다.

파울 클레 ‘파르나소스 산으로’. 1932년. 캔버스에 유화. 100 x 126cm. 베른 국립미술관 소장.


‘파르나소스 산으로’(Ad Parnassum)는 그리스 중부 프티오티다 현에 있는 파르나소스 산을 그린 작품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에서도 언급된 이 산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과 아홉 뮤즈들이 시와 음악을 관장하던 곳이다. 파랑, 오렌지, 초록 색면과 색점들 위에 흰색 점들이 중첩된 이 작품은 마치 모자이크를 보는 듯 하다. 중첩된 색채는 음악적 하모니를 이루고, 연결된 선들은 멜로디가 된다. 간결한 검은색 선으로 그려진 세모와 아치는 건축적 구조를 이룬다. 오른편 위 오렌지색 원은 산꼭대기에서 아래로 서서히 저물어 가는 태양처럼 보인다. ‘파르나소스 산으로’는 음악에 대한 예찬인 동시에 유토피아를 표현한 그림이다.클레는 평생 1만점에 가까운 많은 작품을 남겼다. 57세의 나이로 자가면역질환인 전신경화증 진단을 받고 전신이 해체되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1940년 사망하기까지 그리기에 몰두했다. 호흡곤란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한 클레는 결국 1940년 6월 급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파울 클레 ‘죽음과 불’(Death and Fire). 1940년. 삼베에 오일. 43 × 43cm. 베른 파울 클레 센터 소장.


‘죽음과 불’(Death and Fire)은 1940년 초에 그려진 후기 작품이다. 흰색 두개골이 중심에 있으며, 그의 입과 눈은 죽음을 뜻하는 독일어 ‘T, o, d’로 형상화됐다. 왼쪽 상단에는 죽음의 손이 쉬고 있는 태양이 붉은 들판 가운데 어슴푸레 보인다.

초기 밝은 색상을 사용해 화사한 분위기를 내던 클레의 작품은 전신경화증 발병 이후 굵직하면서도 단순하며 강한 터치, 삼베나 신문지와 같은 거친 물질들을 사용한 그림으로 바뀌었다. 단순하고 두꺼운 검정 크레용 같은 선, 칙칙한 색감은 고통과 죽음, 전쟁을 상징했다.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파도 모양 구조의 베른의 ‘파울 클레 센터’는 4000여 점의 회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클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영국의 현대미술사가 허버트 리드는 클레의 작품 세계를 “유령과 도깨비의 세계이며 수학과 음악 요정의 세계, 꽃과 동물의 세계”라고 했다.

강현철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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