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하게 항전했던 보성 의병의 선구자
남도 의병 열전 ⑪ 정태화
담살이 안규홍 앞세워 부대 결성
아버지 정환종의 아낌없는 지원
가족 희생에도 항전 굴하지 않아
1909년 체포돼 징역 7년형 선고
손자 정순권, 의병사 발굴 노력

최근 전남교육청에서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 80인을 선정해 AI로 복원해 소개하는 특별 기획전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는 의병, 3·1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의열단, 국외 독립운동 등 다양한 계열에서 치열하게 항일운동을 전개한 전남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포함됐다. 이 행사가 돋보인 것은,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한 우리 지역 출신 애국지사들의 빛나는 공적을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전국적으로 알려진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의사 같은 명망가 중심의 기억에서 벗어나, 지역 곳곳에서 피 흘리며 싸운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에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됐다.

◆물심양면 의병 도운 정태화 가족
보성 의병의 전설 안규홍은, 의병부대를 결성할 무렵 지역 유지들의 도움을 받았다. 지역 자산가들은 의병을 빙자한 도적들이 횡행하고 있을 때 그들의 재산을 지키려고 이른바 자위단을 조직했다. 안규홍도 처음에는 이 자위단에 들어갔다.
안규홍은 '담살이' 출신 의병장이라고 한다. '담살이'는 세경을 받고 고용된 머슴을 말한다. 이와 관련해 안규홍의 초기 의병부대 결성과 관련해 참고되는 얘기가 있다.
1907년 말 보성군 백야면(현 겸백면) 입석동(현 석호리 선돌마을)에 사는 정태화는 도로 건설을 감독하는 일본군이 우리 인부에게 함부로 하자 구타해 죽였다. 이때 그의 나이 37세였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의병부대를 조직하려 했다. 1908년 정월이었다. 하지만 태화를 체포하려는 일본군이 포위망이 좁혀오자 그는 몸을 숨겼고, 정태화의 부친은 안규홍을 전면에 내세워 의병부대의 조직을 서둘렀다고 한다. 안규홍이 담살이 출신임에도 초기에 부대 결성이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 이유다. 안규홍의 의병활동은 부당한 일본군의 행동에 저항한 정태화의 행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정태화는 일본군의 추격을 받는 신세가 됐다. 정태화의 부친 정환중은, 친척으로 똑똑한 안규홍을 정태화에게 붙여 돕도록 했다고 한다. 정태화는 피신하면서 안규홍과 의병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정태화는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에 몸을 숨겼고, 대신 안규홍이 의병의 전면에 나섰다고 한다. 태화의 부친 정환중은 안규홍이 결성한 의병부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안규홍 의병부대에 그가 보성에서 이주했던 법화마을 출신과 더불어 백야면 출신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정환종 가족의 호소에 호응에 의병진은 세력을 갖춰갔으며 1908년 초부터 정태화는 초암산에서 이들을 훈련시키며 궐기를 도모했다. 주민들도 십시일반 도움을 주며 의병의 사기는 높아졌고 이들의 활동 반경은 보성을 넘어 순천, 화순, 전북 임실까지 뻗어나갔다. 정환종은 이들의 사기가 떨어지면 기르던 소까지 잡으며 잔치를 벌였다. 정환종은 의병대에 "배가 고파도 약탈은 하지 마라"고 당부하며 사재를 아낌없이 털었다.

◆안규홍과 함께 항일투쟁 이어가
정태화는 안규홍 의진 활동을 앞장서 도왔다. 안규홍의 의병활동에는 항상 정태화가 함께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안규홍의 의진이 300여 명에 이른 적도 있었는데 선돌마을을 중심으로 겸백면 출신들이 대거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정태화의 의병활동과 집안의 몰락사는 선돌마을에 살았던 이후 미력댁(1897년생)의 증언을 통해 알려졌다. 미력댁은 정환종의 의병 지원활동과 일본군의 만행을 증언했다.
한편, 관동 의병 출신으로 순천 지역에서 활동하던 강용언(강사문)이 재물을 겁탈하자 안규홍은 이에 반발해 강용언을 죽이고 부대 지휘권을 장악했다. 비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부대 운영 및 외지 출신인 관동 의병과 토착 의병 사이의 지휘권을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다. 이 다툼에서 안규홍이 이길 수 있었던 데는 법화동, 입석동 등 인접한 지역 출신 의병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가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강용언을 축출하고 독립 의병부대를 형성한 안규홍은 고흥, 순천 등지의 시장을 돌아다니며 의병을 충원하려 했다. 이처럼 시장을 돌면서 의병을 모집한 것은 정미 의병(후기 의병)의 특징이었다. 의병 주도층이 최익현, 기우만 등 지역의 명망가들이 앞장섰던 이전과는 달리 서당 훈장, 평민층, 해산군인 등 다양한 계층이 의병 전쟁의 전면에 나서면서 나타난 양상이었다. 안규홍이 1908년 7월 겸백 석호산에서 재기하려 할 때 촌민들이 스스로 나서서 음식물을 제공했다고 한다.
안규홍과 함께 활동하던 정태화는 호남의병토벌작전이 하달된 1909년 9월경 일본군에 체포됐다. 일본군 정탐병 2명을 심문 후 살려 보내줬는데, 이것이 빌미가 돼 진지가 노출되고 일본군에 공격을 받은 것이다.
이때 보성 의병 상당수도 함께 체포됐다. 이들 실체를 밝혀주는 수형인 명부는 초당대 박해현 교수가 최근 발굴했다. 여기에 따르면, 최동조(17세, 미력면), 박문주(25, 노동면), 조웅(23, 백야면, 겸백면), 김선화(40, 율어면), 한치영(39, 백야면), 선채규(43, 조내면, 조성면), 변봉일(39, 백야면), 정태화(39, 백야면), 정치도(34, 겸어면) 등이 있다. 이들 모두 1909년 10월 30일 재판을 받았고, 11월 5일 같은 날짜에 형이 확정된데다 지역 역시 같은 것으로 보아 이들의 수형이 겸백 의병 활동과 관련이 있음을 알려준다.

정태화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정태화와 함께 체포된 이들 중에는 선채규가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선채규의 본명은 선규명으로안규홍 의진의 선후군장을 맡아 보성 파청대첩, 동복 운월치 전투, 진산 대첩 등에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전남도에서 추진한 미서훈독립운동가 발굴 및 서훈 신청 용역에서 의병계열에서 152명이 추가 서훈 신청됐는데 여기에는 정태화와 함께 체포된 한치영, 정치도가 포함돼 좋은 결과가 기대된다.
한편 정태화가 은둔생활 중 재혼해 낳은 아들 정수현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0월, 6사단 소속으로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에 참가해 일등 중사로 전사했다. 후에 보훈처를 통해 공적을 화인하고 화랑무공훈장을 받게 된다. 정환종의 집안은 아들과 손자뿐만 아니라 아내와 며느리까지 모두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현재는 정태화의 셋째아들인 중현의 아들 정순권씨가 선대의 의병활동을 조사하며 보성 의병의 역사와 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보성 겸백의 선돌마을에서 불붙은 정태화의 항거는 단순한 지역 의병의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름 없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온몸으로 지켜낸 민족정신의 증거이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적 빚이다.
임창균기자 lcg0518@md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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