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프롬 인천·(58)] 동일방직 똥물 테러, 한 장의 사진보다 긴 이야기

박경호 2025. 8. 27. 15:21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용자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

17살에 언니들 따라 동일방직 입사
8시간 화장실도 못가는 열악한 환경
1300명 중 1000명이 여성 노동자,
첫 노조 지부장 여성 나오자 남성들 견제
사측 탄압에 결국 터진 똥물테러 사건

옛 해고 조합원들 찾아나선 건 1999년 말
“노조 투쟁의 명예 훼복할 때라 생각”
‘국가 책임’ 진실 규명… 국가 손배 소송 ‘승소’
“남은 건 복직, 일흔에도 투쟁 멈출 수 없죠”

생애 첫 직장, 첫 투쟁 현장 인천 만석동 공장에 돌아가고 싶어요.
지난 2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 인근에서 만난 김용자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 2025.8.2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하루를 출근하더라도 내 손으로 사직서를 쓰고 싶어요.”

‘아임 프롬 인천’ 58번째 손님으로 초대한 김용자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에게 복직하면 무엇을 하고 싶느냐고 묻자, 그는 이같이 답했다.

1978년 2월21일 인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공장에서 회사 측 구사대가 노동조합 대의원 투표에 참여하려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리고, 바르고, 먹인 이른바 ‘똥물 테러’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그 사진은 한국 노동운동사 그리고 여성노동운동사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그 사진이 워낙 유명한 탓에 동일방직 노조 투쟁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사진 속 장면에만 머물고 있다는 아쉬움은 있다.

그 사건 이전부터, 그 이후에도 수많은 투쟁이 이어졌다. 동일방직은 1978년 4월1일 조합원 124명을 무더기로 해고했다. 해고자 명단에는 김용자도 포함돼 있었다. 정부 당국과 어용노조는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의 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에 배포해 이들의 밥줄마저 끊으려 했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 복직 투쟁을 이어가다 각자의 삶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김용자와 일부 동료들은 또 다른 노동 현장에서 투쟁을 이어갔다.

김용자는 이처럼 숨 가쁘게 살면서, 또 가정에 충실한 시기도 거치면서 잠시 잊었던 투쟁의 이유를 2000년대 들어서 다시 생각해냈다. 자신의 치열한 삶이 비로소 시작된 생애 첫 직장이자 첫 투쟁 현장 동일방직에 복직하는 것. 뿔뿔이 흩어졌던 동료들을 다시 모았고, 복직 투쟁을 재개했다. 이번 58번째 이야기의 핵심이다. 김용자는 동일방직 노동자 출신으로서 “아임 프롬 인천”을 이야기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인천 만석동 공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김용자 뿐 아니라 그의 동료들도 마찬가지다. 많은 이가 끝난 줄로만 알고 있던 동일방직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는 지난 6월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50년 투쟁 기록 ‘긴 투쟁 귀한 삶’(한내, 양돌규·정경원 글)을 펴냈다. 지난 2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만난 김용자의 이야기를 통해 책 제목처럼 기나긴 투쟁 속 피어난 귀한 삶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 열일곱에 입사한 만석동 방직공장

지난 2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 인근에서 만난 김용자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 2025.8.2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김용자는 1956년 1월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 어느 집이나 그랬듯 생활이 어려운 농촌 가정에서 “위로 딸 넷, 아래로 아들 셋”인 7남매 중 셋째다. 동일방직 인천공장에 입사할 때 나이는 17살이었다. 친적 중 한 명이 가장 먼저 동일방직에 들어갔고, 그의 소개로 김용자의 첫째 언니와 둘째 언니가 차례로 동일방직에서 일하게 됐다. 셋째 김용자까지 들어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시골에서 사람을 데려오면 공장에서 인센티브 같은 걸 줬어요. 직원 모집이 잘 되지 않아서 소개를 통해 뽑았죠. 그땐 시골에서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 졸업하면 무조건 일터로 나오는 거였어요. 저희 집은 (셋째인) 저까지 희생을 했고, 제 밑에서부터는 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동일방직에 다닌 우리 세 자매는 만석동 조그마한 쪽방에서 자취했는데, 요 하나 깔면 두 명이 겨우 자는 방이었어요. 공장이 3교대로 돌아가고 세 자매가 1, 2, 3반으로 흩어져 있어서 방 하나로 살기가 가능했던 거죠. 교대 근무라 같이 살면서도 언니들을 잘 만나지 못했어요.”

그랬다. ‘긴 투쟁 귀한 삶’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해마다 50만명씩 일자리를 구하러 대도시로 향했다. 인천 지역 일자리 수 또한 1960년대 초 9만개에서 1970년대 말 23만개로 급증했다. 경공업 육성과 수출로 시작된 한국의 산업화 초창기 수출 1위는 섬유산업이었다. 도시로 이주한 수많은 여성 노동자의 노동력, 즉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이룬 결과다.

“동일방직은 키가 155㎝ 이상 여성부터 뽑았어요. 저는 나이도 어리고 키도 안 됐는데, 공장에서 키가 자랐어요. 동일방직은 다른 공장보다 노동 시간(3교대 8시간)이 짧고 월급이 조금 셌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거예요. 3개월 교육받고 꿈에 부풀어 현장에 투입됐는데 생지옥이더라고요. 실내 온도는 40℃에 솜먼지로 앞이 보이질 않았어요.”

반대파 구사대들이 조합원들에게 똥을 뿌리면서 때리고 있었어요. 현장에 경찰이 배치돼 있었는데, 제가 도와달라고 했더니, ‘쌍년들아 이따 말릴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1978년 2월21일 인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공장에서 회사 측 구사대가 노동조합 대의원 투표에 참여하려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분을 뿌린 ‘똥물 테러’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조합원들이 노조 사무실로 달려가고 있다.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제공

김용자는 실뭉치에서 실을 뽑는 기계인 조방기에서 나온 실을 꼬아 가늘면서도 단단하게 만드는 공정인 ‘정방’에서 일했다. 앞치마에 넣은 스펀지로 얼굴에 붙은 솜 먼지를 계속 털어가며 실이 끊어지지 않는지 지켜봤다. 정방기에서 실이 끊어지면 사람이 이었다. 기계 수백 대가 돌아가는 소리말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웠다. 기계는 24시간 돌아갔다. 8시간 동안 일하면서 식사는 물론 화장실도 갈 수 없었다. 대부분 사업장의 노동 환경은 어느 곳이 더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같이 열악했다.

근무를 마치고 쉴 때는 꽃다운 청춘답게 삼삼오오 모여 이곳저곳을 누볐다. 김용자는 여름이면 경기도 부천 송내에 있는 포도밭과 복숭아밭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온양상회나 충남상회, 똥물 테러 사진을 찍었던 우일사진관 등 만석동 공장 앞 풍경은 여전히 생생하다. 김용자는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회사를 그만뒀다가 제빵공장 등을 거쳐 1977년 동일방직에 재입사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두 언니는 이미 공장을 나왔고, 김용자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지난 2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 인근에서 만난 김용자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가 1978년 이른바 ‘똥물 테러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2025.8.2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노동권 가르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1972년 여성 노동자가 대다수인 동일방직에서 첫 여성 노조 지부장에 주길자가 선출된 이후 회사와 사측 편에 선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 중심 노조 집행부를 견제하고 탄압했다. 당시 동일방직 노동자 1천300여명 중 여성이 1천명에 달했다. 김용자가 재입사하기 한 해 전인 1976년 7월 노조 탄압에 맞서 농성 중이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경찰력이 동원되자 옷을 벗어 ‘나체 시위’로 저항하다 연행되기도 했다. 이렇듯 노조 탄압의 강도가 점점 거세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용자에겐 노동조합은 샘물과도 같았다고 한다.

“언니들이랑 살 때는 집주인이 사측 편인 동일방직 직원이기도 했고, 노조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어요. 기숙사에 들어가서는 친구들과 돈독하게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노조에 가게 됐어요. 조합원이 워낙 많아서 노조에서 조합원을 모두 교육시킬 수 없었는데, 그래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에서 노동권 교육을 받았죠. 저는 노조보다 오히려 산업선교회 조화순(91) 목사님과 친해졌어요. 노조의 역할과 노동권의 소중함을 알게 됐죠.”

선교회서 배운 노동의 가치… 샘물 같았어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노동권에 눈을 뜬 인천 동구 화수동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앞에서 1980년대 후반쯤 김용자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이 촬영한 사진.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제공

1960~1970년대 노동 문제에 대해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종교인들이었다. 감리교 목사 조지 오글(George E. Ogle·1923~2020)은 1961년 인천 동구 화수동에서 초가집을 얻어 인천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이하 인천산선)로 명칭을 변경했다. 인천산선은 인천판유리, 대성목재, 동일방직, 인천부두 등 주요 사업장의 노동 현장으로 목사와 전도사를 보냈다. 이 가운데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들어가 일했다. 인천산선은 1960년대 중후반부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노동권 교육을 시작했다.

인천산선과 조화순 목사의 영향을 받은 김광자 등 여성 조합원 주도로 대의원 선거를 치렀다. 그 결과 한국노총 섬유노조 산하 동일방직지부를 어용노조에서 민주노조로 전환한 것이 주길자 집행부였다. 그러나 회사도, 정부 당국도 여성 노동자 주도 민주노조의 활발한 활동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사측은 지속해서 민주적 노조 선거를 방해했고, 결국 똥물 테러 사건이 터졌다.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똥물사건 당시 사측이 뿌린 똥물을 뒤집어 쓴 여공들의 모습. /동일방직 노동조합 운동사 제공


“오후 2시 출근하는 반이어서 기숙사에서 자고 있었는데, 누군가 복도로 막 뛰어오면서 ‘난리났다. 노조 사무실로 가보라’고 했어요. 옷을 대충 챙겨 입고 방 식구들과 노조 사무실로 뛰어 갔는데, 반대파(구사대)들이 막 조합원들에게 똥을 뿌리면서 때리고 있었어요. 그 현장에 경찰이 곳곳에 배치돼 있었거든요. 제가 경찰에게 좀 말려달라 도와달라고 했더니, ‘쌍년들아 이따 말릴거야’라고 하는 거예요. 농성 경험도 별로 없던 저는 정말 충격받았어요.”

동일방직 노조는 정부 당국, 사측과 어용노조가 합작한 탄압에 명동성당과 인천 답동성당에서 13일 동안 단식 농성으로 맞섰다. 김수환(1922~2009) 추기경 등 종교계 중재로 단식을 마무리했으나, 사측은 조합원 124명을 해고했다.

“노조에 있으면서 현장에서 싸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해고된 후 사회에 홀로 떨어져서 투쟁할 때가 가장 무서웠어요. 우리의 상대가 회사에서 정부로 바뀌어 버린 거죠.”

■ 블랙리스트로 인해 반복된 해고

김용자는 해고 이후 기숙사에서 나온 동료들과 인천산선에서 지냈다. 섬유노조에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전국 사업장에 배포하면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재취업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 복직 투쟁을 이어갔지만, 그 이후 해고 노동자들은 복직을 이뤄내지 못하고 흩어져야 했다.

김용자는 동일방직 이후에도 9번 해고당했다고 한다. 블랙리스트로 인해 동일방직 해고자 출신인 것이 들통나면 재취업한 회사를 나가야 했다. 해고당하지 않을 직종이라고 생각한 것이 ‘버스 안내양’이었다. 김용자는 인천 제물포여객과 항도여객 등에서 버스 안내양으로 일했는데, 그 일터에서 겪은 부조리도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당시 버스 안내양은 새벽 4~5시 첫차부터 일을 시작해 밤 1~2시에야 마칠 정도로 노동 시간이 길었다. 버스가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게 승객을 태운 탓에 안내양은 문을 연 채 매달려 있다가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안내양이 승객 요금 일부를 횡령해 버스 기사에게 상납해야 하는 악습도 있었다고 한다. 김용자는 두 차례 해고 후 선진여객에 세 번째로 입사해 동료들과 버스 안내양 노동 조건 개선을 사측에 요구했다.

1978년 3월 명동성당에서 단식 농성 중이던 동일방직 노조 조합원들을 만난 김수환 추기경.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제공


“마지막으로 안내양을 한 회사에선 노동 조건을 일부 개선했지만, 그 현장 활동 때문에 경찰에 수배까지 됐었어요. 취업한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다가 해고당하면 다시 인천산선으로, 또 취직했다가 해고당하면 인천산선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반복됐어요. 인천산선 갈 때 넘어가는 고개를 ‘한 많은 화도고개’라고 했어요. 그만큼 인천산선으로 돌아와 우는 날이 많았죠.”

인천산선은 1982년 민들레 의료생활협동조합을 설립해 형편이 어려운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의료 사업도 했는데, 그 일을 돕던 김용자는 함께 생협 활동을 한 치과 대학생을 만나 결혼했다. 신혼 살림은 부평에 차렸다. 남편도 노동운동을 하다 2차례 옥고를 겪었다. 김용자는 자녀들을 키우고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생계를 꾸렸다. 그렇게 1980년대, 1990년대를 거쳐 김용자와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의 새로운 투쟁이 시작된다. 국가의 책임을 묻는 투쟁이었다.

■ 명예회복 위한 새로운 투쟁

1999년 말 ‘민주화운동보상법’과 ‘의문사진생규명특별법’이 제정됐다. 김용자, 석정남, 정명자, 최연봉 등 꾸준히 만나왔던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은 옛 해고 조합원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이들은 동일방직 노조 투쟁의 명예를 회복할 때라고 생각했다.

“20년 전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찾는다는 게 불가능했죠. 20년 전 동일방직 노조를 담당했던 인천동부경찰서(현 인천미추홀경찰서)에 공문을 보내 옛 해고자들 주소 찾기에 협조해달라고 했어요. 그 옛날 노조를 탄압했던 경찰에서 해고자 찾기에 협조해줘서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해고 조합원들을 20년 만에 다시 모았어요. 2000년 9월 인천 만수동에 있는 복자수도원에서 첫 모임을 가졌고, 그날 부평 백운역 쪽에 있던 저희 집에서 1박을 하면서 민주화운동보상법의 명예회복 신청서를 작성했어요. 이듬해 11월 해고 노동자 중 76명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습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는 우리가 투쟁하면 탄압만 받았어요. 2000년대 이후부터는 우리가 투쟁하면 이렇게 얻어냈어요.
2001년 인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인천공장을 찾아 복직을 요구한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제공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로 ‘돌아온 동일방직 언니들’은 동일방직 인천공장 정문을 찾아 1978년 부당해고를 철회하고 원직에 복직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듬해에도, 2005년에도 만석동 동일방직 공장을 찾아 농성을 벌였다. 2006년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을 다룬 영화 ‘우리들은 정의파다’가 상영됐다.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동일방직 똥물 테러 사건 등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했고 해고 조치를 지시했다며 진실 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를 토대로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는 국가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다. 8년의 소송 끝에 2018년 법원은 국가가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최종 판결했다.

“국가배상 최종 판결 때 재판정에 있었어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고,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지더라고. 보통 민사소송은 간략하게 판결하는데, 우리가 하도 열심히 재판에 나가서 그런지 판사가 판결 때 우리 이름을 일일이 부르더라고요. 2000년대 이전까지는 우리가 투쟁하면 탄압만 받았어요. 2000년대 이후부터는 우리가 투쟁하면 이렇게 얻어냈어요. 민주화운동 인정도, 국가의 책임 규명과 손해 배상도 받았어요. 우리 가족들에게 비로소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 떳떳하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었어요.”

판사가 판결 때 우리 이름을 일일이 부르더라고요.
2018년 12월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최종 승소한 해고노동자들이 법원 앞에서 촬영한 기념 사진.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제공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는 국가 손해배상금을 비롯한 각종 보상금의 10%를 기금으로 적립했고, 이 가운데 1억원가량을 KTX 여승무원 복직 투쟁, 쌍용자동차노동조합, 콜트콜텍노동조합 등 여러 노동 현장에 기부해 연대의 뜻을 전했다. 김용자는 “기록하고, 연대하라는 얘기를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저에게 인천은 제2의 고향이고,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친정이에요. 지금도 만석동 동일방직 공장 주변을 답사하면 마음이 울컥합니다. 남은 건 복직이고, 그게 우리의 최종적인 명예 회복이에요. 제 나이가 이제 일흔이 다 됐고, 이젠 그만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살아있는 한 그만둘 수 없는 투쟁입니다. 오는 11월 무의도에서 복직추진위 친구들을 또 만납니다. 1박 2일 동안 잠도 안 자면서 아침까지 그 시절 이야기를 또 하겠죠. 아직 할 얘기가 너무 많습니다.”

지난 22일 오후 경기도 고양시 일산 자택 인근에서 만난 김용자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 2025.8.22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 약력
1956년 충남 청양 출생
1973년 인천 동구 만석동 동일방직 입사
1977년 동일방직 재입사
1978년~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2010년~ 동일방직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 대표

/박경호 기자 pkhh@kyeongin.com

Copyright © 경인일보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