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출연연 망친 PBS 굴레에서 '잘' 탈출하기

정부가 지난 22일 출연연의 PBS(연구과제 중심 제도)를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과학기술출연기관장협의회(과출협)은 정부의 PBS 폐지 방침을 격하게 환영하면서 "출연연 과학기술자들이 국가적 난제 해결과 대형 연구 성과 창출에 매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는 입장문을 내놓았다. "연구자들이 불필요한 행정 부담에서 벗어나 연구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속적으로 관심과 지원을 이어가 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출연연 연구원들을 짜투리 생계형 연구과제에 매달리게 만든 PBS의 폐지는 출연연의 30년 묵은 숙원 과제다. PBS를 폐지하지 않으면 출연연의 비상은 불가능하다. 물론 PBS 폐지가 끝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다.
망국적인 PBS를 대체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선진국의 낯선 제도를 베껴오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를 감수하더라도 우리 몸에 꼭 맞는 우리의 관리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 민주화와 함께 들어온 ‘선진’ 제도
PBS(project-based system)는 출연연의 연구원이 자신의 인건비를 자신이 수주하는 연구과제(project)에 계상하는 제도다. 출연연의 연구원이 자신의 인건비를 확보하려면 반드시 정부 또는 민간으로부터 연구과제를 수주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연구과제를 수주하지 못하는 연구원은 당연히 퇴출 대상이 된다.
PBS는 문민정부가 출연연의 국가연구개발사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1996년부터 시행한 ‘선진’ 제도였다. 올해로 꼭 30년이 된다. 연구원들에게 연구 과제 수주를 위한 경쟁을 촉발해서 궁극적으로 출연연의 생산성·효율성을 제고하고 운영의 자율성을 확대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책정하는 ‘출연금’에 의한 기관 운영의 경직성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연구책임자에게 연구 인력의 구성과 예산 집행에 대한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연구 자율성을 강화한다는 명분도 내세웠다. 정부 부처가 수행하는 연구개발 사업을 공개경쟁으로 선정하고 인건비를 사업 과제와 연계하여 지급함으로써 연구개발비 사용의 투명성이 높아지고 사업별 원가를 더 정확하게 산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도라는 것이 당시 정부의 설득 논리였다.
그러나 당시 과기부가 PBS를 시행하게 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과학기술입국’의 꿈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던 권위주의 시대가 끝나고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세계화를 앞세운 시장경제 논리가 밀려들었다. 정부의 철저한 보호막 속에서 안주하던 과학기술이 거칠고 위험한 야생(野生)에 무방비 상태로 내팽개쳐졌다. 정부 주도로 성장해 왔던 과학기술이 한순간에 길을 잃었다.
당시 국가연구개발 예산의 40% 이상을 사용하는 출연연이 거꾸로 사회적 감시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정부의 투자에 비해 성과가 낮고 운영이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대부분의 출연연이 상당한 규모의 ‘가(假) T/O’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다.
실제로 대부분의 출연연이 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않은 연구 인력을 연구원으로 활용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엄격한 규정에 따라 운영해야 하는 공공기관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상황은 매우 심각했다. 문민정부는 일부 출연연의 민영화 가능성까지 검토하기도 했다.
출연연에 대한 예산 배정 방식에 대한 비판도 컸다. 특히 당시 정부가 경직된 방식으로 배정하던 ‘출연금’이 도마 위에 올랐다. 출연금을 연구 활동의 성과에 따라 배정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다. 정부가 출연연의 인건비와 운영비를 정부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연구개발 사업 수행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충분히 보상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정반대로 연구개발 사업을 수행하지 않는 출연연도 출연금을 배정받아 사용하는 구조적 문제도 드러났다.
시장경제와 자유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는 신자유주의 경제 논리가 힘을 얻으면서 PBS 도입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과학기술에서는 1등만 살아남고 2등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식의 거친 주장이 큰 설득력을 발휘했던 시기였다. 친구들과의 무한경쟁에 내몰린 중고등학생들이 사교육 시장의 엉터리 선행학습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본래 PBS는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에서 연구과제 수주에 적극적인 교수들에게 제공하는 인센티브 성격의 제도이다. 연구중심대학의 교수는 공식적으로 대학으로부터 방학을 제외한 9개월에 해당하는 보수를 받고 나머지 3개월은 본인이 수주한 연구과제에 인건비를 계상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바로 PBS의 원형이다.
민간연구소에서 단기간 임용하는 객원연구원에게 적용하는 PBS도 있다. 객원연구원의 보수는 전액 연구과제의 인건비로 계상하며 임용도 연구과제의 종료와 함께 종료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생계형 연구과제에서 탈출하기
출연연 연구원의 무한 경쟁을 유도한다는 '불순한' 의도로 시작된 PBS의 부작용은 심각했다. 출연연 연구원에게는 자신의 인건비를 확보하는 일이 지상 최고의 과제가 되었다.
연구원 개인으로서는 다수의 ‘생계형’ 연구과제를 동시에 수행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되었고 정량화된 성과 평가가 정착되면서 성공 가능성이 낮은 도전적 과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다. 연구원들에게는 연구 성과를 정리한 ‘논문’보다 과제 수주를 위한 ‘제안서’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PBS는 연구기관 차원에서도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경직성 예산인 인건비를 변동성이 심한 연구과제에 의존하게 만든 탓에 기관 운영 예산 확보가 어려워졌다. 더욱이 PBS 운영 과정에서도 문제가 드러났다. 합리적인 인건비 산정과 관리가 쉽지 않고 잔여 예산 정산 등의 어려움이 심각해졌다.
PBS는 과기부 관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변질된 것도 사실이다. 연구과제 수주에서의 공정 경쟁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기획부터 평가와 선정에 이르는 모든 단계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과기부 관료가 출연연 연구원의 ‘상전’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았으며 심지어 PBS는 관료 조직이 출연연을 관리하는 가장 현실적인 수단이라는 지적도 있다.
결국 PBS는 사회적 민주화의 혼란 속에서 지도자의 관심에서 멀어진 출연연을 관료 조직에 의존하여 연명하는 ‘생계형’으로 전락했다. 출연연 연구자들이 관료에게 ‘구걸’하도록 강요하는 제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시도했던 ‘출연연 혁신’이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은 PBS 때문이며 PBS가 버티는 상황에서는 출연연의 ‘자율성’은 비현실적인 꿈일 수밖에 없다.
PBS의 심각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모든 출연연이 어쩔 수 없이 PBS에 ‘순응’하는 현실이다. 또한 PBS를 대체할 출연연 관리 제도에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며 PBS의 폐지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도 분명하다. 그에 따른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선진 제도’의 베껴오기만으로는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선진국이 우리보다 나은 관리제도를 가지고 있지만 낯선 제도를 무작정 따라하는 것도 부질없다.
우리 사회에서 PBS의 실패가 가장 확실한 증거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번에는 어느 정도의 혼란을 감수하더라도 우리 현실에 맞는 ‘K-관리제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목표는 분명하다. 출연연 연구원이 ‘자율적’으로 연구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정부가 출연연 연구원을 신뢰하고 현장에서 연구원의 목소리를 최대한 성실하게 듣겠다는 자세가 핵심이다.
무의미한 정량적 평가의 반복이 연구원의 역량을 키워줄 것이라는 기대도 온전한 착각이다. 이제 정말 출연연을 ‘추격형 과학기술 정책’에 길들어버린 관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만들어야만 한다. 그래야 21세기의 국가 발전에 필요한 과학기술을 기대할 수 있다.
※필자 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 교육, 에너지, 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 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3200여 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우리 몸을 만드는 원자의 역사》《질병의 연금술》《지금 과학》을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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