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보다 나빠”… ‘IMF 구제금융 경고등’ 켜진 복지천국 프랑스

유진우 기자 2025. 8. 27.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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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기 국가부채 5000조원 돌파
佛 바이루 총리, 재정 개혁안 신임투표 강행

유럽 대표 복지국가 프랑스가 재무장관 입에서 ‘IMF 구제금융’ 가능성이 거론될 정도로 심각한 재정 위기에 빠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임명한 프랑수아 바이루 총리는 막대한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공휴일 축소 등 고강도 긴축안을 추진하다 의회 불신임 위기에 몰렸다. 정치와 경제 이중 위기에 빠지자 금융시장에서는 프랑스 국채 금리가 그리스를 추월하는 이례적 장면까지 연출됐다.

일간 르몽드와 파이낸셜타임스(FT) 등에 따르면 26일(현지시각) 에리크 롬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프랑스 라디오 인터뷰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개입 위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프랑수아 바이루 프랑스 총리가 2025년 8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예산 지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랑스 재정 상황은 각종 지표에서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마크롱 정부는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에너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재정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유럽연합 통계청(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올해 1분기 프랑스 국가 부채는 3조3000억유로(약 5000조원)를 넘어섰다. 국가부채는 정부가 갚아야 할 빚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율은 114.1%다. 1년 내내 온 국민이 번 돈을 모두 쏟아부어도 빚 14%가 남는다는 의미다. 이는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에서 그리스(152.5%), 이탈리아(137.9%)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수치다. 독일(62.3%)보다 두 배 가까이 많고, 네덜란드(43.2%)와 비교하면 세 배에 육박한다.

프랑스는 현재 재정 건전성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재정 부실로 ‘돼지들(PIIGS)’이라 불렸던 스페인(103.5%), 포르투갈(96.4%)보다 나쁘다. 한때 IMF 구제금융 신세를 진 아일랜드(34.9%)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다. 만성적인 재정적자로 지난해 프랑스 재정적자 비율은 GDP 대비 -5.8%를 기록했다. 1년 동안 나라 살림에 들어온 돈보다 나간 돈이 5.8% 많았다는 뜻이다. 이는 그리스(1.3% 재정흑자), 이탈리아(-4.3%), 스페인(-2.5%)보다 높은 수치다. 유럽연합(EU)은 안정성을 이유로 –3% 이내를 권장한다.

프랑스 자동차 제조업체 PSA 푸조 시트로엥 공장 조립 라인에서 PSA 직원이 차량을 손보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금융시장에서는 26일을 기점으로 프랑스 10년 만기 국채 금리(3.5%)가 그리스(3.44%)를 추월하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이는 2012년 유로존 금융위기 이후 가장 저조한 기록이다. 함께 유럽을 이끄는 독일 국채와 금리 차는 0.8%포인트로 확대됐다. 프랑스 증시도 흔들렸다. 26일 CAC40 지수는 1.7% 급락했다. BNP파리바·소시에테제네랄 등 대형 은행주는 6% 넘게 폭락했다. 이들 은행들은 프랑스 국채를 대량 보유하고 있다. 프랑스 국가 신용도 하락은 곧 은행 부실로 직결될 가능성이 크다. CNBC는 “투자시장에 프랑스 자산 리스크 프리미엄이 되살아났다”고 전했다.

2025년 4월 파리 서쪽 라데팡스 상업지구 유로넥스트 거래소 건물 디지털 화면에 시장 지표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내각을 이끄는 바이루 총리는 재정 위기가 불거지자 25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그는 다음 달 8일 의회 신임투표를 요청하며 440억유로(약 65조원) 규모 적자 감축안을 제시했다. 바이루 총리는 “지금 부채를 잡지 못하면 절벽으로 떨어질 것”이라며 “의원들은 혼돈과 책임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발표 직후부터 정치권과 유권자는 총리가 내놓은 재정 긴축안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긴축안에는 공무원 감축, 의약품 보조금 삭감과 부활절 다음 월요일과 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일(5월 8일) 등 공휴일 2일 폐지 방안이 포함됐다. 여기에 연금 상한제, 복지 지출 동결, 일부 세목 인상도 추가됐다. 여론조사에서는 유권자 84%가 공휴일 축소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강경 보수 국민연합(RN), 좌파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 사회당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총리가 제시한 긴축안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했다.

프랑스 대통령 에마뉘엘 마크롱(왼쪽)과 이탈리아 총리 조르지아 멜로니(오른쪽)가 2025년 6월 16일 캐나다 앨버타주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서 캐나다 로키 산맥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은 후 떠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정면 돌파 시도는 내각 붕괴 위기로 번졌다. 주요 매체들은 여소야대인 프랑스 정치 상황을 감안할 때 다음 달 총리 신임 투표가 통과보다 부결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내다봤다. 지난해 미셸 바르니에 전임 총리 역시 예산안 처리 실패로 불신임당한 전례가 있다.

정권 붕괴가 눈 앞에 닥치자 마크롱 대통령은 이날 “나라가 위험에 처했다”며 개혁 의지를 다졌다. 현재 프랑스는 이미 국가부채 이자로 연 660억 유로(약 107조원)를 지불하고 있다. 이미 프랑스 국방 예산을 넘어선 금액이다. 내각에 따르면 아무 조치 없이 프랑스 재정을 지금처럼 운영할 경우, 2029년 이자 비용은 연 1000억 유로(약 163조원)로 불어난다. 이는 교육, 복지 등 모든 분야를 제치고 ‘이자 갚기’가 정부의 가장 큰 지출처가 된다는 뜻이다. ING은행 프랑스 담당 수석 이코노미스트 샤를로트 드 몽펠리에는 보고서에서 “프랑스 정치 불안이 경제적 부채가 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어 “올해 성장률은 0.8%에 그칠 것”이라며 “정치 위기가 불확실성을 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극우 정당 '국민연합' 수석 부총재이자 마린 르펜 조카인 마리옹 마레샬이 벨기에 브뤼셀 유럽 의회 근처에서 프랑스 농부들 시위에 참여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유로존 2위 경제 대국 프랑스가 흔들릴 경우, 과거 남유럽 재정위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파가 유럽 전체로 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프랑스는 유럽 GDP 가운데 약 15%, 국가부채 총액은 유로존 전체에서 20% 가까이 차지한다. 골드만삭스는 “이번 사태는 투자자들에게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전반에 걸친 여러 국가 재정 취약성을 상기시킨다”고 지적했다.

다음 달 총리 신임 투표가 부결되면 마크롱 대통령은 새 총리를 임명하거나, 의회 해산 후 조기 총선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는 어느 쪽도 뾰족한 해법이 되기 어렵다. 새 총리를 임명해도 여소야대 의회 구도가 바뀌지 않는 한 재정 개혁안 통과는 불가능하다. 조기 총선은 지금 득세 중인 극우 국민연합 세력만 키워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정치적 부담이 크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에도 조기 총선을 강행했다가 마린 르펜이 이끄는 극우 국민연합을 제1야당으로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프랑스가 심각한 부채 위기를 해결할 정치적 리더십마저 실종된 ‘완전한 교착상태(complete stalemate)’에 빠졌다”고 했다. 복지라는 달콤함에 취해 재정 건전성을 외면한 대가가 프랑스뿐 아니라 유럽 경제 전체를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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