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살리는 귀농스토리] ‘증권맨’서 ‘포도 박사’로… 알알이 여문 ‘부농의 꿈’
“증권사 시절의 정신적 스트레스보다 지금의 육체적 힘듦이 훨씬 낫습니다. 후회는 전혀 없어요.”

거창군 거창읍에서 포도 농장을 운영 중인 이승필씨가 샤인머스켓에 봉지를 씌우고 있다./성승건 기자/
14년간 증권사서 일하다
‘정직한’ 농사 매력 느껴 귀농
퇴직금으로 하우스 마련
귀농 초기 ‘소득 공백’ 3년
‘알 솎기’ 실패로 좌절 겪기도
독학·현장서 배운 지식 바탕
실험 통해 독자적 기술 갖춰
과일대전 수상·수출 등 성과
“소비자 잡으려면 맛 좋아야
전문가에게 배우는 게 정확”
◇“내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는 삶”= 증권사 시절, 그의 삶은 매일 전쟁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주식 시장의 등락 속에서 그는 고객의 자산을 지켜내야 한다는 중압감과 실적 압박으로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증권회사는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고객에서 최선의 결과를 보장할 수 없잖아요. 시장의 부침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니까요. 하지만 농사는 달라요. 내가 노력한 만큼 정직하게 결과가 나오죠.”
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자기 노력의 결실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 큰 매력을 느껴 귀농을 결심했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시작부터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처가 역시 포도 농사를 지었기에 ‘절대 농사만은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아내는 완강히 반대했다. 대기업 증권사에 다니는 아들을 자랑스러워했던 부모님 또한 “육체적으로 힘든 농사일을 왜 하려 하느냐”며 아들의 선택을 만류했다. 많은 고민과 설득 끝에 그는 인생 2막을 열었지만, 진짜 현실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수입 공백, ‘하늘이 무너졌던’ 수확 위기까지= 귀농은 낭만이 아니었다. 퇴직금과 대출금을 끌어모아 땅을 사고 하우스를 짓자, 수중의 돈은 모두 사라졌다.
포도나무를 심고 첫 수확을 하기까지 3년, 그 기간 그는 수입이 전혀 없는 ‘소득 공백기’를 견뎌야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에게 매달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 현실은 고통이었다.
가장 큰 위기는 귀농 초기에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에 찾아왔다. 농사일이 서툴렀던 아내가 돕겠다며 포도송이의 알을 솎아 내는 ‘알 솎기’ 작업을 했는데 경험 부족으로 상품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1년 내내 땀 흘려 키운 포도를 보고 있자니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수확물로 1년을 버터야 하는데 막막했죠.” 수확만을 바라본 농부에게 있어 이 순간은 그의 농사 인생에서 가장 아찔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포도 박사가 되기까지= 그는 좌절하는 대신 책상에 앉았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포도 관련 교재와 토양학 서적까지 수집해 밤새워 탐독했다. 이론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전국의 이름난 포도 농가를 직접 찾아다니며 현장의 살아있는 기술을 배웠고, 자신의 농장에서 배운 것을 실험했다. 한 가지 기술을 검증하는 데만 2~3년이 걸리는 고독한 실험을 수없이 반복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자신만의 과학적 데이터를 더해 독보적인 재배 기술을 갖추게 됐다. 이제 그는 거창군 농업기술센터 등에서 다른 농업인들을 대상으로 강의하는 ‘포도 박사’이자, 후배 귀농인들의 멘토가 됐다.
◇성공의 열쇠는 ‘최고 당도’와 ‘상생’의 철학= 이승필 농부의 성공 전략은 확고하다. 바로 ‘품질’이다. 그는 ‘맛없으면 소비자는 외면한다’는 철학으로 수확량을 희생하더라도 당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데 집중했다. 그 결과 2022년 농림축산식품부가 주최하는 과일 산업대전에서 포도 부문 최우수상(1등)을 수상하며 품질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그는 1600여명의 회원을 보유한 개인 SNS와 농장 직거래를 통해 고품질 포도를 제값에 판매하며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구축했고, 대만으로 수출길을 열어 판로를 다각화했다.
그는 개인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는다. ‘한국포도회 거창지부장’을 맡아 지역 농가들의 동반 성장을 이끌고 있다. “저 혼자 잘사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거창 포도 농가 전체가 고품질을 생산해 높은 가격을 받아야 다 같이 잘살 수 있습니다. 돈이 되는 지역을 만들어야 젊은 귀농인들이 찾아옵니다.”
◇“귀농, 전문가와 소통하세요”= 이승필씨는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는 “막연한 생각으로 외진 곳에 땅부터 사는 ‘맨땅에 헤딩’은 실패의 지름길”이라며, “초기 투자 비용이 부담된다면 고령 농업인의 농지를 임대해 시작하는 것이 위험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검증되지 않은 유튜브 정보에 의존하기보다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지역의 인정받는 전문가와 교류하며 배우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이라고 덧붙였다.
☞ 거창군 귀농귀촌 지원책은
창업자금 세대당 3억
영농대학 무료 운영도
귀농·귀촌을 희망하는 도시민에게 ‘대한민국 귀농 1번지’ 거창군이 든든한 동반자로 나섰다.
자금부터 주거, 교육까지 아우르는 입체적인 지원책으로 예비 귀농인의 성공적인 정착을 돕는다.
군은 먼저 ‘귀농 농업 창업 및 주택 구매 지원사업’을 통해 초기 자금 부담을 크게 덜어준다.
농업 창업 자금은 세대당 최대 3억원, 주택 구매 및 신축 자금은 최대 7500만원까지 융자받을 수 있다. 대출 금리는 연 2%로, 5년 거치 10년 상환 조건이다.
안정적인 영농 기반 마련을 위한 현금 지원도 다양하다. ‘귀농 세대 영농 정착금’으로 2인 이상 세대에 500만원을 지원해 농기계, 농자재 구매 등을 돕는다.
또한 ‘귀농인 안정 정착 지원 사업’을 통해 교육비, 컨설팅비, 농기계 임차료 등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금 150만원을 추가로 지원한다.
체계적인 영농 교육 시스템은 거창군만의 강점이다. 군은 ‘귀농·귀촌인 영농 대학’을 무료로 운영해 기초 영농 기술 습득을 돕고, 선도 농가에서 5개월간 실습하며 월 80만원의 교육비를 받는 ‘귀농인 농업 인턴제’를 통해 현장 경험을 쌓을 기회를 제공한다.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지원책도 돋보인다. 예비 귀농인은 ‘귀농인의 집’을 통해 월 5~15만 원의 저렴한 임대료로 거주하며 정착을 준비할 수 있다.
또한 빈집을 매매하거나 임대할 때 ‘주택 리모델링 사업’으로 최대 500만원의 수리비를 지원받는다.
청년층 유입을 위한 맞춤형 지원도 빼놓을 수 없다.
박준영 기자 bk6041@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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