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없을 것입니다

한겨레 2025. 8. 26.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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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이 잡념잡상 _19 김정남 선생 (하)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인도에 한 성자가 있었다. 어느 날 제자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너희들은 새날이 온 것을 어찌 아느냐?” 한 제자가 답한다. “동이 터오고 날이 밝는 것을 보고 압니다.” 다른 제자 “사물이 형체를 내어 산천초목이 보일 때 압니다.” 또 다른 제자 “사람들 발소리와 말소리가 들리면 새날이 오는 것을 느낍니다.”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제자들이 그럼 어떻게 아느냐고 따지듯 되물었다. 스승 답한다. “날이 밝아 밖을 보았을 때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너의 형제처럼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온 것이다.”

김정남 선생이 김수환 추기경에게서 들은 얘기다. “당신이 부득이 해외에 나가게 되었다면서, 잡지사 연두 말씀을 청탁받았는데 저더러 대신 쓰라고 하면서 구술”해 준 내용이다. 언제, 지나는 사람들이 형제처럼 보일까? 새날은 지나는 사람이 아닌 내가 바뀌어야 온다는 말씀, 그때 행자는 성자가 된다.

김정남은 책 ‘이 사람을 보라’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또 하나의 정부’라고 했다. 제정 러시아 말기에 차르의 압제 정부가 하나, 톨스토이로 상징되는 또 하나의 정부가 있었듯이, 1970~80년대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 정부가 하나, 그리고 추기경을 구심으로 하는 또 하나의 정부가 우리 마음속에 존재했다고 썼다. 두 사람의 인연은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던 1974년 가을 시작되어 2009년 추기경이 선종하기까지 오래 이어진다. 김정남 선생은 가톨릭과 민주화 진영을 잇는 가교였다. “(추기경은) 분열과 어둠의 시대, 모든 억울한 사람들의 통곡의 벽이었으며, 언로가 막힌 세상에서 유일한 위안과 소통의 통로, 피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울타리였습니다. 저는 추기경에게로 가는 작은 통로였을 뿐입니다.”

‘1988년 봄이었을 것이다. 나는 행당동 산꼭대기 박 대령의 집을 찾아가고 있었다. 군인 신분이어서 그는 3심에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1980년 3월6일 시흥시 소래 야산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에게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있었다. 큰딸이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앞의 책 ‘이 사람을 보라…’ 김재규 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김정남은 10·26 사건을, 우리 민주화를 20년 앞당긴 ‘김재규의 고독한 혁명’이라고 했다. 당시 그는 사제단과 함께 구명운동을 주도했다.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배우 김응수가 분한 김재규 비서관 박흥주 대령, 강변에서 공중전화로 딸과 통화하는 마지막 장면이 나온다. 참모총장감이었다는 그 사내, 넉달 뒤 처형된다(향년 40). 8년이 흐른 봄날, 아무도 찾지 않는 망자의 집을 찾아가는 길. 구명운동 당시 사제단에서 대학 등록금을 산업은행에 예탁해 두었다고 한다. 큰딸이 대학 들어갈 때가 되자 잊지도 않고, 그 돈을 들고 언덕길을 올라 부인에게 건네주고, 언덕길을 내려온다. 자기와의 약속이 이토록 엄한 이 대목,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김재규 사건은 지난달 16일 서울고법에서 재심 공판이 개시됨으로써 45년 만에 무죄를 다투는 길이 열렸다.

김정남은 1988년 ‘평화신문’ 창간에 관여하면서 편집국장(대리)을 맡는다. 생애 첫 취직이었다. 그는 8개월 일하면서 우리 출판의 전환기적 발자취를 남긴다. 먼저 ‘의문사 1호’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이 쓴 ‘양심선언’을 신문에 실었다. 고문치사 의혹을 담은 이 글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뒤에 ‘산 자여 말하라’라는 책으로 묶여 나온다. 사회주의자 서준식의 옥중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미치도록 나가고 싶습니다. 나는 블레이크의 시도 좋아하고, 바흐의 음악도 좋아하고, 아버지 어머니 생각할 때는 탈옥이라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양심을 버리고 사회안전법 때문에 전향서를 쓰고 나갈 수는 없습니다.’ 이 편지들이 신문에 연재됐고, 훗날 책 ‘새벽의 절망을 두려워 않고’로 출간된다.

‘옥 뜰에 서 있는 눈사람. 연탄 조각으로 가슴에 박은 글귀가 서늘합니다. “나는 걷고 싶다.”’ 통혁당 장기수 신영복의 옥중 수기에 나온다. 평화신문에 실렸다. 유명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그것이다. 그가 제목을 달고, 서문을 썼다. 책을 찾아보니 서문 기명이 ‘평화신문’이다. “여기에도 이름을 안 쓰셨네요” 했더니, “‘평화신문’이라 그러면 됐지”라고 한다. 그리고 이태의 ‘남부군’까지, 그가 땅속에서 발굴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인 사람들의 이야기가 세상에 나와 빛을 보았다.

와이에스(YS·김영삼)와의 인연은 각별하고, 길다. 1975년 상도동에서 만난 첫인상을, ‘위엄 있는 지도자라기보다 고생 모르고 자란 성공한 서방님 타입’이라고 했다. 와이에스 부탁으로 성명과 연설문 초안을 쓰고, 여러 정치적 자문에 응했다. 1979년 신민당 전당대회 김영삼의 총재 수락 연설, ‘마침내 새벽이 돌아왔습니다. 아무리 새벽을 알리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민주주의의 새벽은 오고 있습니다’, 그가 썼다.

1983년 5·18 3주기 와이에스 성명 ‘단식에 즈음하여’, 그해 8·15 ‘김영삼 김대중 공동성명-민주화 투쟁은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투쟁이다’ 역시 그의 손에서 나왔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사의 널리 회자되는 대목들도 그의 문장이다.

‘부정한 수단으로 권력이 생길 때 국가의 정통성이 유린되고 … 목적을 위해 절차가 무시되는 편법주의가 판을 치게 됩니다. 이 땅에 다시는 정치적 밤은 없을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에게 말합니다. 세계는 … 평화와 협력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민족과 국가 사이에도 다양한 협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습니다.’

‘정치적 밤’은 ‘쿠데타’다. 박정희 5·16, 전두환 12·12, 윤석열 12·3이 다 자정 무렵에 발발했다. 민주 선거는 낮의 일이고, 쿠데타는 밤의 일이고 보면, ‘정치적 밤’은 상징의 언어로서,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이 말 역시, 시대를 꿰는 통찰의 언어로서, 명문이다.

김정남은 와이에스를 따라 청와대로 들어간다. 사회문화수석, 두번째 취직이다. 집에 넥타이가 없어 하나 사서 매고 출근했다. 전교조 해직 교사 복직과 ‘위안부’ 할머니 수급자 지정,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주도했다. 그리고 별 50개가 떨어진 하나회 척결, 공직자 재산 공개, 역사 바로 세우기 등 문민정부 개혁의 논리적 기초를 잡았다.

이듬해, 조선일보가 김정남의 등에 칼을 꼽는다. ‘사상이 의심스러운 정부 내 용공주의자’, 그는 ‘빨갱이’로 몰린다. 청와대 빨갱이 당장 자르라는 보수 집단의 집요한 공세가 이어지고, 와이에스는 굴복한다.

“비겁한 짓이지요. 언론이 아니라 자객입니다. 내가 조선일보나 그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얘기 중에 너희들은 조국을 끌어안고 한번이라도, 단 하루라도 울어본 일이 있느냐? 사실 나는 많이 울었거든요. 저녁에 흐느끼기도 많이 하고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닌데…. 이 조국이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놓고 진짜 끌어안고 몇 밤씩, 밤을 샌 사람이 몇이나 되느냐,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되묻곤 했습니다.”

2년을 못 채우고 청와대를 떠났다. 대개 수석을 하면 높은 자리로 가게 마련인데, 그는 ‘한직이면 내가 싫고, 요직이면 내가 부족하다’는 말을 남기고 재야로 돌아온다.

2006년, 시인 장석이 터를 닦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12년 일했다. 월급도 없고 후원을 끌어와야 하는 자리에 앉아 정수일 선생과 교유하며 집필에 힘썼다. 책 ‘진실, 광장에서다’, ‘우리는 너를 결코 빼앗길 수 없다’, ‘이 사람을 보라1, 2’ 등을 썼다. 2016년 현충원 김영삼 대통령 비문도 그가 썼으니, 단식에서 무덤까지, 그 인연이 길다.

‘어두운 시기의 얼굴 없는 위대한 투사’(리영희). ‘민주화 운동의 대부’(홍성우).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은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고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주화 운동이 없었다. 그러나 한번도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고, 또 내세운 일도 없었다’는 말을 남겼다.

투사이자 대부이며 문사였던 김정남 선생, 가만 보면 그의 한생이 다 ‘사람 살리는 일’이 아니었나 싶다. 어두웠던 시대, 그는 그렇게 오래도록 ‘새날’을 준비했다.

이광이 | ‘정말로 바다로 가는 길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바다로 가는 노력을 그쳐본 적이 없다’ 목포 김현문학관에 걸린 이 글귀를 좋아한다. 시와 소설을 동경했으나, 대개는 길을 잃고 말아 그 언저리에서 산문과 잡글을 쓴다. 삶이 막막할 때 고전을 읽는다. 읽다가 막히면 ‘쓴 사람도 있는데 읽지도 못하냐?’면서 계속 읽는다. 해학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쓴 책으로 동화 ‘엄마, 왜 피아노 배워야 돼요?’, ‘스님과 철학자’(정리), ‘절절시시’, 산문집 ‘행복은 발가락 사이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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