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정의·평화 위한 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질문에 답하는 연극
2025년, 올해는 대한민국 역사에 있어 여러 의미를 지닌 해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적으로 맺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120주년, 일본 식민지 37년이 끝난 광복 80주년, 그리고 박정희 정권 시절 체결한 한일기본조약 60주년까지. 한반도 역사를 결정지은 굴곡진 순간들이 2025년을 거쳐 간다.
기념비적인 해를 맞아, 제주에서 의미 있는 연극 한 편이 올려졌다. 바로 구럼비유랑단이 만든 '안녕 간토'다.
박수환 작, 방은미 연출의 '안녕 간토'는 지난 24일 제주문예회관 소극장에서 공연됐다. 이 작품은 1923년 일본에서 벌어진 간토(관동)대지진과 동시에 자행된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다. 너무나 큰 상흔을 남긴 비극적 역사가 후손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설정을 중심으로, 역사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은 무엇을 선택하고 기억해야 하는지 메시지를 전한다.

역사·사람이 극적으로 결합한 서사
'안녕 간토'는 2025년과 1923년 일본 도쿄를 배경으로 한다. 등장인물은 모두 일본인으로 설정됐다.
대학 도서관 사서로 평생 일하다, 은퇴 후에는 도서관 경비로 일하는 사람 좋은 중년 '나카지마 신이치'(배우 김신용) 가정이 극의 중심이다. 신이치는 역사학자인 큰 딸 '리카'(이영주)와 오사카에 사는 아들 '료스케'(장대성)를 두고 있다. 논문 작성과 결혼을 차일피일 미루는 큰 딸을 놀리면서 얼큰하게 취한 신이치에게 어느 날 예고 없이 아들이 찾아온다. 아들은 결혼을 약속한 여인 '와타나베 아키코'(김미영)와 동행했다.
작품은 아들이 방문하기 전까지, 부녀 간 주고받는 농담과 밀고 당기기로 비교적 여유 있게 진행된다. 그러다 아키코와 리카 사이에 벌어졌던 학창시절 사건과, 결정적으로 아키코 집안이 공개되면서 긴장감 있게 전환된다. 신이치는 아들과 아키코의 결혼을 결사반대한다. 그 배경은 1923년 간토대지진이 자리하고 있다.
1923년 9월 1일 정오 즈음, 도쿄를 포함한 간토·시즈오카·야마나시 지방에 진도 7.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한다. 지진으로 발생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15만 명 이상으로 알려졌다. 당시 일본 내각은 다음 날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사태를 수습했다. 그러나 '한국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방화·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꾸리고 재일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일본 내각이 지진으로 인한 내부 불만을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문을 퍼트렸다는 의혹이 있다. 간토대지진으로 희생된 조선인은 수천에서 1만 명 이상이라는 분석이 있으나 정확한 피해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작품은 2025년에서 과거로 돌아가 1923년 9월 대지진이 발생한 직후, 도쿄의 어느 일본인 가정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제주 출신 조선인 부부와 갓난아이, 그리고 오키나와 출신 일본인 남자와 본토 여인 부부가 함께 살고 있다. 조선인 남자와 오키나와 남자 모두 와타나베 조선소에서 일하고 있다.
'안녕 간토'는 홀로 살아남은 일본 여인이 조선인 아이를 정성들여 키우고 어느덧 손녀·손자까지를 이어진다는 한 가정의 아픈 역사 속에서, 나카지마 집안과 와타나베 집안의 악연과 인연을 4대에 걸쳐 풀어낸다는 꽤나 극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진다.
특히 학창시절 아키코가 리카를 조선인이라고 괴롭히는데 일조했던 과거, 아키코가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알리는 시설에 일한다는 설정을 입히면서 가해와 피해가 시간을 거슬러 교차하는 서사를 만들었다.

1923년 지옥도에서 학살을 저지른 장본인도, 조선인을 구한 것도 아이러니하게 일본인이었다. 또한 따돌림 가해자였던 아키코를 향해 "너 혼자 무릎 꿇고 용서 구하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역사학자 리카의 충고는, 일본정부와 일본사회를 향한 묵직한 일갈이기도 하다.
작품은 배려와 반성의 가치를 강조한다. 동시에 극 말미에 과거 인물이 현재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연출로서, 우리가 역사를 망각한다면 언제든 끔찍한 과거가 재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한다.
이렇게 사뭇 진지한 메시지와 출연진들의 매끄러운 연기가 결합하며, '안녕 간토'는 인상 깊은 작품으로 기억에 남기 충분하다. 출연진은 연극 뿐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까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연기력을 뽐냈다. 영상 활용도 과하지 않게 깔끔했다. 다만, 극 막바지에 신이치의 독백에 지나치게 의존해 과거를 풀어낸 연출은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무대를 통한 사회 활동을 멈추지 않는 연출가 방은미, 구럼비유랑단의 활동은 기억해야 마땅하다. 행정 입장에서는 민감하게 여길 주제일 수 있으나, 제주도 문화예술진흥원은 '안녕 간토' 공동기획으로 참여했다.
'안녕 간토'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출신 조묘송 일가의 사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조묘송 일가는 간토대지진 이후 뱃속 아이까지 모조리 희생됐다.

묵묵히 사회 정의와 평화의 길을 걸어가다
연극 '안녕 간토'는 천주교제주교구 사회사목위원회, (재)성프란치스코평화센터(이하 평화센터)가 주최했다.
특히 평화센터는 간토대학살을 포함한 역사 문제를 예술로 알리는 활동을 공들여 진행하고 있다.
양용찬 열사의 삶을 재현한 연극 '사랑 혹은 사랑법' 제작(2021), 간토대지진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1923 제노사이드, 93년 간의 침묵' 상영회(2023), 전 세계 여성 평화운동가들의 활동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 '크로싱' 상영(2023), 제주4.3부터 광주5.18, 세월호참사, 이태원참사까지 한국사의 아픈 상처를 조명한 연극 '사난 살주' 제작(2024), 간토대지진을 증언하는 1920년대 일본판화와 사진, 동시대 미술작품을 소개한 이순려·이지유·정용성 작가전 '그림 한 점의 소명' 제작(2024), 그리고 연극 '안녕 간토'(2025)까지. 평화센터는 이 밖에도 다양한 평화 활동에 주최하고 동참하고 연대하고 있다.
평화센터는 지난 2015년 천주교 제주교구 지원을 받아 서귀포시 강정마을에 문을 열었다. 해군기지 건설로 극심한 갈등을 빚은 장소에, 평화의 가치를 알리는 거점으로 자리한 셈이다.
평화센터는 사업 활동으로 ▲생명과 평화 영성을 위한 전례 및 사목 활동 ▲생명과 평화 실현을 위한 학술 교육, 문화 활동 ▲생명과 평화 실현을 위한 지역 주민 및 국내외 단체와의 연대 등을 정해두고 있다.
7년째 평화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성환 신부는 센터 활동에 대해 소박하지만 진정성 있게 말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정의가 구현돼야 하죠. 구현되지 않은 대표적인 정의가 바로 한일관계라고 생각합니다. 102년 전에 벌어진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을 두고 아직도 일본 정부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한국 정부도 관심이 덜하죠. 우리 같은 평화센터가 이런 일을 안 하면 어느 단체가 하겠어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세상에 알려야 정의가 서고 평화가 오겠죠. 이런 활동이 계속 이어지고 쌓인다면 언젠가는 억울하게 죽은 영령들이 편하게 잠드는 날이 오겠죠. 우리가 사는 동안에는 안될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역사가 정립되고 언젠가는 평화가 오리라고 봅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통해 드러난 문제적 종교들의 적나라한 민낯과 정치권과 부적절하게 결탁한 종교들의 행태를 보며, 종교란 과연 무엇인지 곱씹을 수 밖에 없는 오늘 날이다.
생전, 예수는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천한 취급을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다. 십자가를 달고 있는 많은 한국 교회들이, 과연 그들이 섬기는 예수의 삶을 따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바다를 마주보는 제주 서귀포 강정마을 한 가운데, 평화센터의 활동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