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청구서’에 웃는 보잉…한국·카타르·일본, 동맹국들 줄줄이 지갑 열어
연이은 추락 사고와 품질 논란으로 위기에 빠졌던 미국 항공기 제조사 보잉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앞서 일본, 카타르 등 각국은 미국 고율 관세 위협을 피하기 위한 보험으로 수십조 원에 달하는 보잉 항공기 구매 계약을 잇따라 체결했다. 25일(현지시각) 대한항공도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 항공 역사상 최대 규모 항공기 구매 계약을 발표하며 이 대열에 합류했다.
26일 대한항공은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워싱턴 D.C.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직후 70조원 규모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보잉 항공기를 100대 이상 사들이고, GE(제너럴일레트릭)에어로스페이스로부터 엔진 구매와 정비 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다. 이번 계약은 대한항공 역사상 최대 규모로, 787 드림라이너, 777X, 737 맥스 등 보잉 주력 기종이 모두 포함됐다. 하워드 루트닉 미 상무장관은 이날 블룸버그에 “방금 전 103대 항공기와 206개 GE 에어로스페이스 엔진 구매를 발표했다”고 했다.

대한항공 계약은 트럼프 행정부가 벌여온 ‘항공기 세일즈’ 외교 연장선에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몇 달간 무역 협상 상대국들로부터 1000대에 육박하는 보잉 항공기 구매 약속을 받아냈다.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이 카타르를 방문하자 카타르항공은 최신형 787 드림라이너 130대와 777-9 30대를 포함해 최대 210대, 960억 달러(약 133조원)에 달하는 계약을 맺었다. 백악관은 이를 “항공기 제조사 역사상 가장 큰 규모 와이드바디(광동체) 항공기 수주”라고 자평했다.
뒤이어 7월에는 일본이 무역 협상 일환으로 보잉 항공기 100대 구매에 합의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같은 달 인도네시아 국영 가루다항공도 보잉 제트기 50대 구매를 놓고 최종 협상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트럼프 행정부는 현재 중국과도 최대 500대 규모 항공기 판매를 포함한 무역 협상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 금액을 유일하게 명시한 카타르항공을 기준으로 항공기 1000대 가격을 추정하면 약 4570억 달러(약 636조원)에 달한다. 다만 이는 단순 추정치로, 실제 총 계약 금액은 항공기 기종과 세부 옵션, 계약 내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했다.

이런 대규모 수주 배경에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거래의 기술’이 자리 잡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걸고 지난 4월 교역 상대국 무역수지 불균형을 맹공하며 고율 관세 카드를 꺼냈다. 정치전문매체 악시오스는 각국이 트럼프발 관세 폭탄을 피하고, 트럼프 행정부와 우호 관계를 다지기 위해 미국 제조업 상징이자 최대 수출 기업인 보잉 항공기를 대량 구매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투자정보업체 CFRA 리서치 매슈 밀러 애널리스트는 악시오스에 “관세 위협에 직면하거나 워싱턴과 유대 강화를 모색하는 국가들이 보잉에 눈을 돌렸다”고 했다. 그는 “항공기는 대당 가격이 수천억 원에 달해, 구매 계약만으로도 양국 무역 통계를 단번에 바꿀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며 보잉이 트럼프 행정부 양자 협상 테이블에서 핵심적인 수출 도구가 됐다고 전했다.

보잉은 올해 트럼프 행정부가 전 세계를 상대로 무역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지난해 1월 벌어진 알래스카 항공 737 맥스 기종 동체 구멍 사고가 결정적이었다. 당시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국제공항을 이륙한 알래스카 항공 여객기가 4800미터 상공을 비행하던 중, 사용하지 않는 비상구 공간을 막는 도어 플러그가 동체에서 떨어져 나갔다. 급격한 감압이 발생했지만, 조종사들이 비상 착륙에 성공해 탑승객은 전원 생존했다. 여느 항공 사고와 달리 이는 악천후나 조종사 기술 문제가 아닌 기체 결함이 원인이었다. 미 연방항공청(FAA)은 사고 직후 보잉 생산 절차 전반에 대한 강도 높은 조사를 벌였다. 주력 상품이었던 737 기종은 운항 중단 뿐 아니라, 생산 중지 조치까지 받았다. 언론은 ‘보잉 품질 관리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붕괴했다’고 했다. 그 사이 경쟁사였던 유럽 에어버스는 꾸준히 생산량을 늘리며 시장 점유율 격차를 벌렸다.
여기에 미·중 무역 갈등이 고조되면서 최대 시장인 중국 수출길에 불확실성이 커진 것도 악재였다. 이 여파로 보잉 주가는 2024년 12월 기록한 최고가(267달러) 대비 40% 넘게 폭락하며 올해 4월 136달러까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5월 카타르 대규모 수주를 신호탄으로 각국 구매 계약이 봇물 터지듯 이어지자 주가는 극적인 반전을 이뤘다. 보잉 주가는 지난 4월 최저점 대비 67% 급등해 25일 227달러로 장을 마감했다. 대한항공 계약 소식이 전해진 직후 시간 외 거래에서 한때 2% 이상 추가 상승하며 투자자들 기대감을 반영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보잉 밀월 관계는 상업 항공기 판매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3월 트럼프 대통령은 미 공군 차세대 전투기(NGAD) 개발 사업자로 보잉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F-47로 명명된 6세대 전투기 개발 사업은 초기 계약 규모만 200억 달러(약 28조원)가 넘는다. 항공업계에서는 이 프로젝트가 수십 년간 수천억 달러 규모로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비영리단체 오픈시크릿츠에 따르면 보잉은 워싱턴 정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1998년부터 3억 5700만 달러(약 4960억원)가 넘는 로비 자금을 썼다.

일각에서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실제 최종 계약까지는 수많은 변수가 남았다는 지적이다. 뉴욕타임즈(NYT)는 “진짜 힘든 계약과 금융 협상은 대통령 전용기가 떠난 후에야 시작한다”며 발표한 계약 상당수가 법적 구속력이 약한 양해각서(MOU) 수준일 수 있다고 했다.
일부 미국 매체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전 세계를 상대로 거둔 외교적 성과가 보잉 내부 문제로 빛이 바랠 수 있다고 했다. 보잉은 현재 5900대가 넘는 항공기 수주 잔고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2024년 알래스카 항공 동체 구멍 사고 이후 미 연방항공청(FAA)은 안전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생산 확대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 공장에서는 8월 초부터 여태 3200여명 노동자가 파업 중이다. 이들은 임금 인상과 연금 보장을 요구하며 생산 차질 우려를 키우고 있다.
NYT는 전문가를 인용해 “트럼프 행정부가 항공기와 항공사 간 계약을 지정학적 호의와 연계하는 오래된 역학 관계를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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