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시인이 아니고 가수였네요

고정국 2025. 8. 2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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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국의 시와 시작 노트] (133) 파리와의 외출 · 2 

외출에서 돌아와 넥타이를 풀고 물 한 컵 마시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맞은 편 정면에서 꼼짝 않고 나를 쏘아보는 그 무엇이 있었다. 파리였다. 경마공원 근처에서 차창 밖으로 떨어져나간 바로 그 녀석!
"너 맞지? 바로 너지? 근데 용케도 살아 돌아왔구나."
"……."
파리가 차창 밖으로 떨어져나간 것이 나 때문이 아니라 바로 너 때문이었다고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 했다. 거기에다가
"너를 잃고 내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모른다."라며 펑펑 거짓말을 쏟아냈다. 이 가엾은 '사회지도층인사'의 사설과 변명은 궁색하고 비굴했다.

파리는 오래도록 말없이 뒷다리를 들어 한쪽날개만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적어도 자기가 차창 밖으로 떨어져 나왔을 때, 잠시 차를 세워 둘러보는 시늉이라도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따지려는 눈치였다. 한참을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도 파리는 계속해서 뒷다리로 날개 쓸기만 계속하고 있었다.
"야,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냐?"
그래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입안이 씁쓸했다. 그리고 몇 초가 지났다. 
"아저씨, 부탁인데요……."
"글쎄, 그 부탁이 뭐냔 말이여?"
나의 언성엔 어느새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아저씨, 먼저 차에서 부르던 그 노래 끝까지 계속해줄 수 없겠수?"
"뭐?, 야 지금 이 판국에 '최불암시리즈' 하냐?"
"파리 세상에 죽는 거야 다반사지라우, 근데 '파리'에 관한 노래 한 번들을 수 있다면야 이 파리, 죽어도 여한이 없어라우!"
"어쭈, 요것 봐라 이젠 전라도 말투?, 미안하지만 그건 너희들 파리노래가 아니라 프랑스 '빠리'의 노래야 인마!"
"그래도 상관없응께, 불러줘요 제발, 플리즈, 오넹아이!"
파리는 건망증이 심해서 지난 일에는 연연하지 않을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결국, 
"쿵작짝 쿵작짝, 쿵작짝 쿵작짝
내가 울던 파리, 내가 울던 파리
눈물의 추억만 남아 또다시 울던 파리…, 짜-안…"
'빠리'를 '파리로 발음하면서, "쿵작짝, 쿵작짝" 왈츠 박자를 중간 중간 끼워 넣으며 열심히 파리의 비위를 맞췄다. 나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던 파리는, 노래를 마치자 천천히 내 어깨에 날아와 앉는다.
"아저씨, 당신은 시인이 아니고 가수였네요…… 흑흑"
파리의 목소리에는 울음 섞인 진실이 섞여 있었다.
그때서야 나도 솔직하게, 
"인간사회에선 파리 생명 정도는 목숨도 아니"라 했다. 그 말에 파리는
"그걸 내가 왜 모르겠수, 헌데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사람들 목숨도 파리 목숨이나 별 다른 점이 없는 거 같던데요?"라 한다. 그 말에 힘없이 나의 고개가 꺾인다. 

파리는 차츰 힘겨운 목소리로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무엇보다도, 그 아득한 사선을 넘고 넘어 악착같이 중산간 우리 집에 찾아온 이유가 오로지 <내가 울던 파리>노래를 끝까지 듣기 위함이었다는 말에 나는 경악했다.

공휴일 아침,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그런데 늦잠 때면 반드시 내 콧등을 간질이던 파리가 오늘 아침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젯밤 늦게까지 쓰던 원고를 마무리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 메모지 위에 까맣게 죽어 있는 파리 한 마리를 보았다. 허공에 대고 허우적거리던 다리가 이미 멈추어있고, 날개 한쪽이 찢겨 있어서인지 하늘 향한 몸통이 왼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실종당시 받은 충격과 상처를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죽어서야 찾아온 파리 목숨만한 평화……, 그 슬픈 평화가 메모지 위에 가볍게 놓여 있다. 나는 메모지를 들고 한참동안 파리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려 "후-"하고 불었다. 플라스틱 쓰레기 통 바닥에서 아득하게 파리 시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한민국 광복 60주년을 맞는 아침의 일이었다. (2005)

#시작노트

1년 전에 낭송했던 「파리와의 동거」와 오늘 낭독하는 「파리와의 외출」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른 듯 하면서도 비슷합니다.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에는 우선 산문과 운문이라는 점과 일 년이라는 기간과, 하루라는 단편적 시간과 공간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파리가 사람에게, 사람이 파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그 비슷하면서 그 전달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시작노트>역시 부분적으로 중복돼 있다는 점을 고백합니다. 고맙습니다.

#고정국

▲ 1947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 출생
▲ 1972~1974년 일본 시즈오카 과수전문대학 본과 연구과 졸업
▲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 저서: 시집 『서울은 가짜다』 외 8권, 시조선집 『그리운 나주평야』.  고향사투리 서사시조집 『지만울단 장쿨레기』, 시조로 노래하는 스토리텔링 『난쟁이 휘파람소리』, 관찰 산문집 『고개 숙인 날들의 기록』, 체험적 창작론 『助詞에게 길을 묻다』, 전원에세이 『손!』 외 감귤기술전문서적 『온주밀감』, 『고품질 시대의 전정기술』 등
▲ 수상: 제1회 남제주군 으뜸군민상(산업, 문화부문),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유심작품상, 이호우 문학상, 현대불교 문학상, 한국동서 문학상, 한국해양문학상 등
▲활동: 민족문학작가회의 제주도지회장 역임. 월간 《감귤과 농업정보》발행인(2001~2006), 월간 《시조갤러리》(2008~2018) 발행인. 한국작가회의 회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