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2) 백범 김구와 광주·전남- 곳곳에 아름다운 인연들…독립운동 거목 성장 뒷받침
함평 이진사가·보성 쇠실마을 등에 흔적
광복 후 본인·아들 찾아와 고마움 표시
전재민에 후원금 쾌척 광주백화마을 탄생
지역민, 기념관·은거비 세워 정신 계승
독립 발자취 ·겨레 큰 스승 만날 수 있어
(이별이 어려워라 이별이 어려워)
離別難處花樹開
(이별이 힘든 곳에도 꽃나무 꽃 피우네)
花樹一枝分折半
(꽃나무 한 가지 반으로 나누어)
半留宗家半行帶
(반은 종가에 두고 반은 가지고 간다)
生我天地逢何時
(나를 낳은 천지 언제 다시 만날까)
捨此江山去亦難
(이 강산 버려두고 가는 것도 어렵네)
四員同遊至月餘
(네 사람이 함께 놀며 지낸지 한달여)
齟齬惜別而去也
(서먹하게 석별하며 떠나간다)
日後見此或可思
(훗날 이를 보면 혹 생각날까)
餘否耶遺此表情
(남을지 아닐지 몰라도 이 정표 남기네)

백범 김구(1876~1949)의 '이별난' 한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고 일제하 독립운동의 상징인 김구는 일제를 피해 은신했던 전남 보성 득량의 쇠실마을을 떠나면서 답례로 자신이 보던 책 '동국역대기'를 남겼다. 이 책에는 당시 가명인 김두호의 서명과 이별을 아쉬워 하며 남긴 '이별난(離別難)' 한시가 적혀있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김구가 처음 광주·전남을 비롯한 삼남(충청·전라ㆍ경상) 지방을 찾은 건 구한말이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그는 1894년 9월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격하기도 했다. 이후 의병활동에 가담, 1896년 3월 명성왕후를 시해한 원수를 갚기 위해 일본군 장교를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 나루에서 처단한 후 5월 해주 감옥에 투옥된 뒤 1897년 사형 선고를 받았다.

■도망자 시절 은거한 함평·보성
치하포 사건으로 탈옥수 신분이던 김구는 함평 이진사댁에서 1898년 보름 동안 머물렀다. 낮에는 육모정 밑 토굴에서, 밤에는 안채 다락방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함평 이씨 이동범(1869~1940)은 20세기 초 가옥을 건립했으나 이후 안채 7칸 겹집과 정자 육모정은 없어졌다. 다행히 ㄱ자형 사랑채와 문간채는 현재도 보존되고 있다. 이진사가는 함평읍내 상가에서 조금 떨어져 인적이 드물고, 기산산성의 고지대로 조망이 용이, 백범의 은닉에 적절한 장소였다.
이진사는 일제 강점기에 직접 독립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독립군을 음으로 양으로 도우며 독립자금을 기부하는 등 우국지사였다. 김구가 함평을 떠날 당시 상당한 노잣돈을 마련해 주었고 해방 후 김구의 아들 김 신 장군이 이진사가를 방문하기도 했다. 김신이 이진사가로 올 때 경찰서를 거쳐서 관내의 모든 경찰이 동원돼 보초를 서는 등 삼엄한 경계를 폈다고 한다.
이후 김신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이진사가를 방문했다. 비행기로 저공하며 김신이 잘 머물고 갔다는 감사의 편지를 떨어뜨렸고 그 편지를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다. 지금도 김구 선생님의 후손과 이진사의 후손들이 상호간의 왕래가 이어지고 있다.
김구는 1898년 도망자 시절 전남 보성군 득량면의 쇠실마을 김광언의 집에서도 40여일을 은신했다. 그의 나이 23세때였다. 쇠실마을은 안동김씨의 집성촌이다. 김구는 김광언의 집에 머무르며 뒷산 바위에 올라가 운동도 하고 바위 밑으로 흐르는 물에 멱을 감으며 지냈다고 한다. 특히 지역민에게 당시의 시대상과 우리 역사를 가르쳤는데 그가 떠난 후 쇠실마을에는 문풍(文風)이 일어나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김구는 이곳을 떠나며 선씨 부인으로부터 필낭을 선물 받고 답례로 답례로 자신이 보던 책 '동국사기'를 남겼다. 백범은 떠날 때에야 '내가 일본사람을 죽이고 피해 다닌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며 이별시 격인'이별난'을 동국사기에 적었다.
김구는 광복 후 1946년 9월 22일 자신을 숨겨준 고마움을 잊지 않고 쇠실마을을 다시 찾았다. 이때 쇠실마을의 가가호호에 대형 존영과 휘호 등을 하사해 후손들이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보성군 삼정리 쇠실마을은 48년 전 망명할 때 수 삼개월이나 머물렀던 곳이다…내가 48년 전 유숙하여 글을 보던 고 김광언 씨의 가옥은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환영하니, 불귀의 객이 된 김광언 씨에 대한 감화를 금할 수 없었다." -백범일지 중에서-



■광주 동구 백화마을
김구는 48년이 지난 1946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이름으로 다시 삼남지역을 찾는다. 과거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사람들에게 은혜를 갚기 위한 보은의 답방이었다.
광주 방문때 광주대성초등학교에서 '김구 선생 환영 기념강연회'가 열렸다. 광주부윤(시장)인 서민호씨가 환영인사를 하면서 귀국동포 전재민들의 어려운 처지를 말하자, 김구는 그동안 여러 곳에서 성금으로 받은 선물, 해산물, 육산물, 금풍 등을 모두 전재민을 위해 사용해달라고 기증했다. 전재민은 해방 전 강제징용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우리 국민을 말한다.
서민호 부윤은 김구의 희사금을 종잣돈 삼아 지역유지들의 헌금을 보태 옛 학3동 8거리 주변에 4~4.2평의 작은 건물 100여 가구를 세웠다. 김구가 '백 가구가 화목하게 살라' 고 지어준대로 '백화(百和)마을'이라 불렀고, 전재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학동8거리는 원래 1920~30년 무렵 일제 강점기 때 세워진 곳이다. 마을 한가운데로 들어가면 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은 다시 8갈래의 방사선 골목길로 되어 있고 그 길로 다시 가다보면 같은 8갈래의 방사선 모양의 또 다른 광장이 나오는 형태이다.
그런데 8거리는 일장기의 빨간 태양으로부터 뻗어나간 모양을 그린 욱일기의 형상을 재현해 만든 거리로 알려져 있다. 동그란 공동 우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8거리는 일본 제국주의 힘을 상징하는 표상이었으며 주민들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것 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학동 재개발 과정에서 보존보다는 철거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있다.
2011년 이곳에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광주광역시와 동구청은 김구와 백화마을의 아름다운 인연을 기억하기 위하여 학동 역사공원을 조성했다. 김구의 일대기와 휘호 기록판, 백화마을의 유래를 상징화한 말집 쉼터, 백범 동상 등이 전시돼 있다.
그 후 광주전남지역에서 김구의 나라사랑,겨레사랑 정신을 선양해온 사단법인 백범 문화재단이 국가 보훈처,광주광역시,독지가의 도움으로 학동역사공원 안에 2015년 광주백범기념관을 건립했다. 김구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1876년부터 1949년까지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를 3기(국내 독립운동, 국외 독립운동, 통일운동)로 구분하해 전시하고, 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1천16인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김구 기념관은 서울 효창원과 광주학동역사공원 딱 두 군데에 있다. 효창원에 있는 백범김구기념관은 1999년 12월 정기국회에서 기념관 건립 기금 지원이 의결되어 국고 지원과 국민 모금으로 건립, 2002년 10월 22일 개관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프롤로그] 이역만리에 남은 독립운동의 숨결…영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1) 상해 임시정부 주역 활동- "호남이 없으면 나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3) 임시정부의 ‘비밀금고’ 전라도- 3·1만세운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4) 광복군과 전라도 출신들- 거센 황토 바람 맞으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5) 중국으로 간 광주학생독립운동 주역- 일제 감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6) 만주서 피어난 항일무장투쟁의 불꽃- 황덕환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7) 대종교 3부자 나철·나정련·나정문- 단군 정신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8) 중국 만주의 광양촌, 전라도인의 삶터- 생계·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9) 3·1운동 불씨 된 ‘2·8독립선언’ - 남도일보
- [광주·전남 독립운동가 해외 발자취를 찾아서] (10) 오사카 독립운동- 음악·교육·노동계서 총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