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태의 라르고] 위대한 성취는 더러운 삶을 지울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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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의 2019년 영화 '장교와 스파이'는 작품 자체보다 감독을 둘러싼 논란이 더 강렬한 흔적을 남긴 작품이다.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을 호출하는 이 영화는 권력의 제도적 폭력이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재조명한다.
폴란스키가 '장교와 스파이'를 연출한 까닭도 '핍박받는 유대인'인 드레퓌스와 역시 유대인인 자신의 무고를 동일시함으로써 '희생양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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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을 영화화하며
대형 영화제에서 잇단 수상
자신의 추문 왜곡하며 감춰
업적 좋으면 부도덕해도 되나
도덕과 성취 한쪽을 무시하면
우리 사회 건강해지기 어려워

로만 폴란스키의 2019년 영화 '장교와 스파이'는 작품 자체보다 감독을 둘러싼 논란이 더 강렬한 흔적을 남긴 작품이다.
1894년 드레퓌스 사건을 호출하는 이 영화는 권력의 제도적 폭력이 한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재조명한다. '독일 간첩' 혐의를 받은 드레퓌스 대위가 형 확정 후 종신 유배를 당한 뒤 정보부장으로 취임한 중령 피카르는 드레퓌스의 유죄가 조작된 증거에 기초했음을 눈치채는데, 군부는 체면을 지키고자 보고를 은폐한다. 하지만 피카르의 집요함 덕분에 드레퓌스는 10년 뒤 무죄로 석방된다.
역사의 재연을 다룬 흔한 첩보극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살벌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폴란스키의 개인사 때문이다. 잘 알려졌듯이, 그는 1977년 13세 소녀에게 약을 먹인 뒤 성폭행해 여섯 건의 형사 기소를 받고 무려 50년 가까이 도주 중인 문제적 인물이다. 폴란스키가 '장교와 스파이'를 연출한 까닭도 '핍박받는 유대인'인 드레퓌스와 역시 유대인인 자신의 무고를 동일시함으로써 '희생양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에게 가해진 정죄의 부당성을 드레퓌스에게 투영했으며 그런 점에서 폴란스키는 피카르 중령과 같은, 자신의 무죄를 확언해줄 현실 메시아를 이 영화를 통해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혐오스러운 '장교와 스파이'의 작품성이 워낙 뛰어나다는 점이었다. 폴란스키는 이 영화로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세자르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세자르상 호명 직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주연 배우 아델 에넬은 "이건 수치"라며 화를 내면서 행사장을 나가버렸고, 2년 뒤 폴란스키가 베니스영화제가 열리는 리도섬에 도착했을 때 현수막엔 이런 문구가 선명했다. '강간범의 섬(Island of Rapists)'.
폴란스키 논쟁은 이런 질문을 우리의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작가의 삶과 작품의 위대함은 분리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비단 예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치 역시 같은 딜레마 앞에 서 있다. 예술가는 작품 뒤에 숨을 수 있을지 모르나, 공적 무대에 선 정치인은 정책 뒤에 숨을 수 없다.
정치인의 성취 이면에서 비위가 드러나는 순간, 사회는 갈라지고 논쟁이 폭발했던 역사 때문이다. 산업화를 이끌었으나 폭력적 권위주의로 얼룩진 과거, 위기 속 경제를 관리했으나 개인과 측근 비리로 무너진 권력, 정의를 내세우며 개혁을 주창했지만 결국 측근 의혹의 중심에 서며 개혁 명분을 스스로 붕괴시킨 정치인…. 모두 같은 도식의 반복이었다. '장교와 스파이' 식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더러운 추문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당사자들은 앞다퉈 드레퓌스의 탈을 쓰고 당당히 무대에 올라 자신을 피해자로 연출하지 않던가.
우리는 여전히 도덕과 성취의 병치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를 내리지 못한 채, 20세기를 지나 21세기의 4분의 1을 지나왔다. 그나마 앞세울 법했던 성취는 오염된 도덕 때문에 차갑게 지워지고, 성취의 그림자 속에서 도덕이 조롱거리가 되는 세상, 칭송과 비난이 서로를 상쇄하며 함께 공허하게 붕괴되는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
위대함만 찬미하는 순간 우리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것, 도덕을 절대화하는 순간 성취까지도 쓰레기장에 버려진다는 점을 우리는 잊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므로 위대한 성취가 결코 도덕적 무구함을 담보하지 못하며 도덕적 순결이 반드시 성취를 낳지도 못한다는 모순부터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취할 태도는 화해가 아니라 병치다. 성취와 도덕을 하나의 수치로 환산해 상쇄하지 말고 서로 다른 장부에 끝까지 기록하는 일, 성취와 도덕의 긴장을 단번에 해소하려는 유혹을 거부하는 것, 그것이 불협으로 물든 사회가 지향해야 할 성숙이 아닐까.

[김유태 문화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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