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참외를 선물하며

해마다 참외 농사를 짓는다. 할아버지를 따라 참외밭 원두막에 오르내리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서다. 원두막에서 내려다본 노란 참외와 초록색 참외, 이따금 눈에 띄는 개똥참외와 하얀 참외는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예전의 할아버지는 밭에서 딴 각종 참외를 마차에 싣고 만수동에서 배다리 참외전 거리로 황소를 몰았지만, 할아버지의 연세가 된 나는 평소 신세 진 지인들에게 선물하기에 바쁘다.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은 만큼 자란다는 말이 있다. 부지런히 밭고랑을 넘나들며 퇴비를 주고 지하수를 뿌렸더니 참외 맛이 꿀맛이라고 찬사를 보내온다. 한데 올해는 별일이 벌어졌다.
선배 지인이 심심하다며 밭일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전에 농사지은 경험이 있다기에 노랑참외 모종에 퇴비를 뿌려 달라고 부탁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퇴비로 모종 줄기를 덮으면 안 되는데 지인은 피라미드 성을 쌓았다. 다음 날 아침, 참외 모종은 파김치가 되어 널브러져 있다. 퇴비를 걷어낸 후 분갈이하듯 흙을 뒤집어주고 물을 뿌리며 응급조치를 취했건만 며칠 사이 42개의 모종 중 22개가 고사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핑계 삼아 품종을 바꿔 심었다. 지금은 희귀종이 돼버린, 옛날 개똥참외를 회상하며 모종값이 노랑참외보다 2배나 되는 개구리참외를 심고 수박 모종도 심었다. 상추밭 옆엔 3배나 비싼, 속이 연분홍색인 비타민참외를 심었다. 빛 좋은 개살구라더니 비싼 개구리참외와 비타민참외는 단맛이 전혀 없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노랑참외가 농부의 체면을 지켜 주었다.
신기한 일은 노랑참외도 초록색 참외도 아닌, 색이 반반 섞인 혼혈 같은 변종이 군데군데 열린 것이다. 난생처음 본 참외다. 개구리참외는 럭비공처럼 타원형 외관에 청개구리의 얼룩무늬가 정석인데 간혹 진한 수박 무늬가 열려 참외인지 수박인지 헷갈리게 한다. 노랑참외와 개구리참외와 수박을 구분하지 않고 섞어 심은 탓일까? 콩 심은 데 콩이 나와야 하듯 노랑참외 심은 자리에 노란 열매가 열려야 하는데 제멋대로, 제 편한 대로 가끔은 모종이 아예 말라 죽거나 돌연변이까지 열리는 이변이 마치 이기적인 세상사를 보는 듯하다.
오랜만에 대사를 치르며 내 맘 같지 않은 세상인심을 새삼 깨달았다. 얼마 전 자녀를 출가시킨 후 크게 실망하던 지인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예전에 약국을 하던 시절, 급하다며 빌려 간 돈과 외상 약값을 요구하는 내게 "사람이 어떻게 빌린 돈과 외상값을 다 갚고 살아요?"라고 반문하던 진상 손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동안 상대방에게 베푼 내게 마음의 상처를 안겨준 지인들도 있지만, 변치 않고 보듬어 준 분들도 많았다. 해서 요즘은 막내딸 혼인을 치르며 신세 진 분들에게 고생해 키운 참외로 보답하고 있다.
/김사연 수필가·전 인천문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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