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英 총리는 왜 트럼프 앞에서 무릎을 꿇었나

임민혁 국제부장 2025. 8. 24.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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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비위 잘 맞춘 스타머
우수한 ‘관세 성적표’ 받아내
美 갑질 견뎌야 할 향후 3년
당당·유연 사이 절충점 찾아야
지난 6월 16일 앨버타주 카나나스키스에서 열린 G7 정상회담에서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떨어뜨린 영-미 무역협정 서류를 줍고 있다./AP 연합뉴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가 트럼프 미 대통령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고 영국 네티즌들이 난리를 친 적이 있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무릎을 꿇은 듯한 장면이 있었다. 트럼프가 전 세계를 상대로 벌인 관세 전쟁에서 영국은 지난 6월 가장 먼저 협정을 체결했다. 당시 스타머와 함께 기자들 앞에 선 트럼프는 합의문을 담은 폴더를 들고 나왔는데, 폴더를 펼치자 문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그러자 스타머가 즉시 허리를 숙이고 땅에 떨어진 종이들을 주워 올렸고, 이를 내려다보는 트럼프와 대조가 됐던 것이다. 카메라 플래시가 집중되자 스타머도 멋쩍은 듯 “매우 중요한 문건”이라고 했다. 트럼프는 허허 웃으며 이 모습을 지켜봤다. 모양새는 좀 빠졌지만, 그동안 트럼프 비위를 가장 잘 맞춰왔다는 평을 들었던 스타머는 ‘상호 관세 10%’라는 매우 우수한 성적표를 국민에게 내밀 수 있었다.

유럽연합(EU)의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도 관세 협상을 위해 성격을 죽여야 했다. 그는 7월에 스코틀랜드 턴베리 골프장으로 트럼프의 호출을 받았다. 비행기를 타고 도버해협을 건너 정해진 시각에 도착했지만, 트럼프는 필드에 있었다. 이런 경우 골프를 중간에 끊고 손님을 맞으려 달려오는 건 외교 의전이 아니더라도 그냥 상식적인 예의다. 하지만 트럼프는 남은 홀을 다 돌고 여유 있게 샤워까지 한 뒤 나타났다. EU도 그날 협상을 극적으로 타결했지만, 트럼프를 기다리는 동안 폰데어라이엔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을지 궁금하다.

트럼프 이전에도 국제사회에는 엄연히 갑과 을이 존재했다. 다만 그때는 갑질이 일정한 틀 안에서 제한적으로 이뤄졌고, 방식도 점잖고 세련됐었다. 지난 반세기 이상 ‘수퍼 갑’이 이익과 함께 정의(正義)까지 추구하는 인류사에 없던 시절을 을들은 누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갑은 웃통 벗고 문신 드러낸 채 각목을 휘두르고 있고, 을은 속으로 부글거리면서도 순응하고 있다. 각국 협상팀은 트럼프나 미국 장관들이 있는 곳으로 불려다니거나 찾아가야 했다. 그래서 만나면 다행이지만, 스위스 대통령처럼 워싱턴까지 날아갔는데 트럼프 얼굴도 못 보고 온 경우도 있다.

갑질에 휘둘리지 않고 힘 대 힘으로 붙은 건 중국 같은 또 다른 수퍼갑뿐이다. 중국은 미국의 관세 폭탄에 ‘희토류 수출 통제’로 맞받았고, 포드·GM 등 미 자동차 회사 공장들을 가동 중단 위기로 몰아넣었다. 중국 협상단은 한 번도 미국을 찾아가지 않았다. 세 차례 미·중 관세 협상은 제네바·런던·스톡홀름에서 열렸다. 트럼프·시진핑 담판에서 최종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트럼프가 이를 위해 베이징을 찾아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약자에겐 강하고 강자에겐 약한 게 또 트럼프다.

‘당당한 외교’란 말은 항상 듣기 좋다. 진영 결집을 위해 특정 국가에만 선택적으로 당당함을 보인 경우가 문제였지, 원칙적으로 부당한 압박에 참지 않고 할 말은 한다는데 누가 반대하겠는가. 다만 기존의 문법이 다 무용지물이 된 지금의 특수한 환경에서, 당당함과 ‘비위 맞추기’ 사이 절충점을 찾는 것이 전 세계 외교의 공통 숙제가 된 듯하다. 우리에게는 조선·반도체 같은 ‘한칼’이 있지만, 냉철하게 보면 경제는 물론 안보의 대미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우리의 위치는 중국보다 영국·EU 쪽에 훨씬 가깝다.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본질적 국익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쏟아지는 이유다. 말이 쉽지 자칫하면 안보·경제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고, 여차하면 ‘굴욕’ 딱지가 붙는 난제다. 좋든 싫든 앞으로 3년은 트럼프와 함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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