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실용 외교에도 ‘급’이 있다면

파리/정철환 특파원 2025. 8. 24.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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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미국 백악관에서 마크 뤼터 NATO 사무총장,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알렉산더 스텁 핀란드 대통령, 조르지아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과 회동 중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중앙에서 오른쪽으로) /연합뉴스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배울 때 가장 많이 들은 단어가 ‘현실주의’였다. 국제정치를 보는 시각은 크게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로 나뉜다. 국내 학계의 주류는 현실주의다. 국가 간 관계는 철저히 힘의 우열에 의해 정해진다는 분석이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 쉽게 납득이 간다. 이웃의 큰 나라가 쳐들어와 영토를 빼앗고, ‘대국을 대하는 태도가 불량하다’며 문화 교류와 자원 수출을 끊으며, 무역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수십 %의 관세를 매겨도 약한 나라는 그냥 당할 수밖에 없다.

유엔에서 190여 국이 아무리 옳고 그름을 논해봐야, 미국·중국·러시아가 안보리에서 반대하면 국제법은 무력해진다. 한국은 중국·일본·러시아 등 강국들 사이에서 이 냉혹한 사실을 체험해 왔다. 현실주의가 한국이 국제정치를 이해하는 지배적 관점이 된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이를 실천에 적용할 때다. 강국과 역학 관계를 지나치게 의식해서인지, 한국 외교는 미·중·러가 짜놓은 ‘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안보는 미국과 동맹에, 경제는 중국 공급망에 의존하다 보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더 강조되는 것이 ‘실용 외교’인 듯하다. 주어진 현실의 이면에서 국익을 극대화하자는 접근, 현실주의의 전략적 응용이다. 하지만 기존 한국식 실용 외교는 한계가 뚜렷하다는 비판이 많다. 외교는 본질적으로 겉과 속이 다른 게임, 상대의 수를 읽고 허점을 노리는 게임이다. 미·중·러가 친 울타리 안에서만 노는 나라의 전략은 어느 정도 뻔할 수밖에 없다. 결국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잘 알수록, 실천에선 이상주의의 ‘가면’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명분과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 실익을 챙기는 데 더 효과적일 때가 많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상주의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6·25 전쟁이 대표적이다. ‘국제법 수호’ ‘공산주의 확장 저지’라는 명분이 세계 16국 195만명의 파병과 물자·의료 지원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을 살렸다. 당시 미국이 쓴 전비는 300억달러, 지금 가치로 4000억달러에 육박한다. 서방의 지난 3년 반 우크라이나 군사 지원액(약 2000억달러)의 두 배다. 트럼프가 당시 미 대통령이었다면 과연 한국을 지키려 했을까.

현재 세계 30국이 우크라이나 안전 보장을 위한 ‘의지의 연합’에 참여하고 있다. 이 중엔 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 등 작은 나라, 일본과 호주 등 비유럽국도 있다. 러시아 눈치를 보지 않아서도, 국제정치의 현실을 몰라서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주권을 함께 지킨다’는 명분 아래 장기적 국익을 봤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무기 수출, 전후 재건 참여, 에너지·안보 협력 등이 거론된다. 만약 실용 외교에도 ‘급’이 있다면, 이 정도는 돼야 ‘A급’ 평가를 받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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