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죄가 없다 [삶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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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쯤 시장에 나온 아오모리 사과를 한입 베어 물다 심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언젠가 선물로 받은 사과가 하도 맛있어서 해마다 그즈음 주문해 먹는 곳이었다.
안부 인사를 겸해 사과농장에 전화했다.
해마다 10월이면 먹던 그 사과 맛이 기억 속 미각으로 머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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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쯤 시장에 나온 아오모리 사과를 한입 베어 물다 심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아삭아삭 씹히는 햇사과의 육질과 새콤달콤한 맛을 기대한 게 뭐 그리 큰 죄라고.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으며 사는 인생이라지만 미각에 대한 배신만큼 머리털 곤두서는 일도 없다. 그 뒤로 두어 달, 사과를 먹지 않았다.
10월이 되었을 때 군위에 있는 사과농장에 전화를 걸었다. 언젠가 선물로 받은 사과가 하도 맛있어서 해마다 그즈음 주문해 먹는 곳이었다. 전화받은 농장주가 난처한 말투로 양해를 구했다. "짐작하시겠지만, 올해 사과가 영 애매합니다. 품질도 그렇고 작황이 안 좋아 놓으니 가격도 많이 올라갔고요." 우선 한 상자를 주문했다. 단단한 식감은 좀 떨어졌지만, 당도는 나무랄 데 없었다. 고도 높은 산간에서 과수원을 하는 그 농장주님 덕에 작년의 사과 대란은 그럭저럭 넘겼다.
어디 사과뿐일까. 나와 형제들은 해마다 8월 초순이면 고향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복숭아 농장으로 나들이를 간다. 가서 선물용 복숭아는 직거래 가격으로 사고, 벌레나 새가 살짝 쪼아 먹은 것들은 반값에 구매한다. 때로 폭풍우에 떨어진 낙과를 대량으로 사서 절임이나 잼으로 쟁여두고 일 년 내내 먹기도 한다. 말랑하게 잘 익은 백도를 신이 내린 최고의 과일이라 믿는 나로서는 이곳에 갈 때면 소풍 떠나는 아이처럼 들뜬다. 한데 농장을 시작한 이후 별 어려움이 없었다던 이곳에도 두 해 연속 흉작이 들었다. 4월 이상 저온으로 꽃이 냉해를 입은 데다 6월과 7월에는 긴긴 열대야에 폭우까지 겹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자연의 일 앞에서 우리가 무슨 힘을 쓰겠어요." 체념한 듯 웃는 농장 안주인 얼굴에 그늘이 짙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작년과 올해만의 문제는 아닐 터다. 몇 년째 주말 농부로 살면서 예상보다 가파른 기후환경 변화를 절감한다. 오랫동안 여름 텃밭의 주인 역할을 해온 얼갈이배추와 열무, 상추 같은 작물이 7월 폭염과 폭우에 녹아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밭 한 귀퉁이에 씨를 뿌렸던 모닝글로리와 그린 빈(줄기콩)은 달랐다. 강렬한 햇살 아래서 게걸스레 광합성을 해대던 이 아열대 식물들은 며칠간 퍼부은 폭우를 흠씬 빨아들이며 몸집을 불렸다. 덕분에 모닝글로리와 그린빈 볶음을 밥상에 올리면서도 기분은 영 개운치 않았다.
지금껏 자연의 치유력과 뭇 생명의 적응력을 낙관하며 살았다. 하지만 밭일을 하다 보면 어떤 임계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불안이 자주 든다. 안부 인사를 겸해 사과농장에 전화했다. 작황을 묻는 내게 농장주는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신품종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여의치 않으면 다른 작물을 심는 것도 고려 중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울적했다. 해마다 10월이면 먹던 그 사과 맛이 기억 속 미각으로 머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꼭꼭 숨어버린 으름처럼, 개암처럼…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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