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슈곤약: 여름꽃 사이로 가을 익는 소리 [황금비의 수목원 가드닝 다이어리]

한겨레 2025. 8. 24.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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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색의 열매가 맺힌 큐슈곤약. 천리포수목원 제공

황금비 | 천리포수목원 나무의사

흔히 가을을 두고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달력이 가을에 닿기 전 푸르뎅뎅한 열매가 빼꼼 나타나 무럭무럭 익어가는 계절은 바로 여름이다. 무화과나 블루베리 같은 친숙한 여름 과일부터 통통한 비행접시처럼 생긴 붓순나무의 열매, 뾰족한 각이 마치 가지에 맺힌 별 같은 좀참빗살나무의 열매까지, 화려한 여름꽃을 보는 것도 좋지만 가지각색 열매를 찾아보는 것도 여름철 수목원의 재미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형태와 알록달록한 색채의 열매로 시선이 닿으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여름철 화단의 조연이 있다. 바로 큐슈곤약이다.

꽃이 핀 모습의 큐슈곤약. 천리포수목원 제공

천남성과 곤약속에 속한 여러해살이풀인 큐슈곤약은 그 이름처럼 우리가 다이어트 식품으로 자주 먹는 곤약과 같은 속에 속한 식물이다. 일본, 대만, 중국의 습하고 따뜻한 기후에서 자생한다. 곤약이 식물의 뿌리를 가공한 식품이라는 사실, 그리고 원료 식물의 친척을 수목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지만 곤약이 선보이는 독특한 모양새를 빼놓고는 큐슈곤약을 완벽히 설명할 수 없다.

큐슈곤약 줄기의 모습. 올리브색의 줄기에 흰색 반점이 듬성듬성 나 있다. 천리포수목원 제공

우선 늦은 봄 그늘진 땅속 뿌리에서 흰색 반점이 있는 올리브색 줄기가 우뚝 솟아난다. 마치 땅에 꽂아놓은 지팡이처럼 생긴 줄기는 약 1m 안팎의 크기로 자라는데, 6월이 되면 줄기 끝에 옅은 자갈색 깔때기 모양의 불염포가 하나 벌어진다. 꽃잎처럼 생긴 불염포는 사실 꽃잎이 아닌 꽃을 감싸는 커다란 한장짜리 포엽이다. 그 안에 우뚝 솟아오른 꽃줄기에 바로 큐슈곤약의 꽃이 빽빽하게 핀다. 천남성과 식물의 꽃차례(꽃이 피는 방식이나 모양)를 육수꽃차례라고 하는데, 부드러운 꽃줄기 주변으로 작은 꽃들이 밀집해 피어나는 꽃차례를 의미한다. 잘 연상되지 않으면 부들을 생각하면 된다. 가을철 냇가 주변에서 마치 갓 튀긴 핫도그 꼬치처럼 흔들리는 부들의 꽃 역시 육수꽃차례다.

초반 색깔이 물들기 전 큐슈곤약 열매의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8월에 들어서면 수분을 마친 큐슈곤약의 꽃에 알알이 올리브색의 열매가 맺힌다. 옥수수 열매 같은 모양새인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홍색, 파란색, 짙은 남색까지 이어지는 이색적인 그러데이션을 선보이며 익어간다. 해적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 ‘원피스’에서는 먹으면 악마와 같은 특수한 능력이 생기는 ‘악마의 열매’가 등장하는데, 만화의 그것과 다르긴 하지만 만약 현실에서 악마의 열매가 있다면 큐슈곤약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만 일반적인 천남성과의 식물처럼 큐슈곤약의 열매에는 심각한 독성이 있어 잘못 먹으면 말 그대로 ‘악마의 열매’가 되니 주의해야 한다.

큐슈곤약 꽃차례의 모습. 천리포수목원 제공

무덥고 습한 여름에는 수목원에 있는 수목들도 종종 해충 피해를 당하곤 하는데, 큐슈곤약도 이를 피하지 못했다. 지난 7월30일, 채 아침 해가 뜨기도 전인 새벽 5시에 가드너들이 수목원에 모였다. 일부 화단에 퍼진 흡즙성 해충인 미국선녀벌레를 방제하기 위해서다. 성충이 되기 전 약충 시기의 미국선녀벌레는 큐슈곤약, 비비추, 수국 등의 가지에 달라붙어 식물의 수액을 흡즙한다. 피해를 본 화초는 수세가 쇠약해지고, 해충의 분비물과 흰색의 왁스 물질로 인해 광합성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날 가드너들은 3시간가량 수목원 곳곳을 돌며 국소적으로 약제를 살포하는 한편, 피해가 심한 가지나 화초는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수목원이라는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동물이 서로 균형점을 찾아 삶과 죽음의 순환을 이어나가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지만, 최근에 유입된 외래해충 피해는 천적을 이용하거나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등의 친환경 방제가 어려운 편에 속해 가드너들의 고민이 깊은 것이 현실이다. 점점 더 무덥고 습해지는 여름 날씨와 날로 어려워지는 외래해충 방제를 맞닥뜨리며 기후 위기를 직접적으로 실감하기도 한다.

나무 그늘 습한 곳에서 자란 큐슈곤약. 천리포수목원 제공

막바지 여름을 보내고 있는 수목원은 아무래도 소란스럽다. 배롱나무 기둥에 허물을 남긴 채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는 가끔 오줌을 싸고, 연못을 가득 덮은 수련은 힘차게 꽃을 피웠다가 오므리는 일을 반복한다. 휴가철을 맞아 수목원을 함께 찾은 탐방객 사이에서는 곰솔 사이로 부는 서늘한 바닷바람에 작은 감탄사가 터지고, 인기척에 지레 놀라 달아난 호랑나비는 금세 다시 돌아와 화려한 꽃에 대롱같이 생긴 입을 꽂는다. 만약 나무뿌리가 땅에서 물을 흠뻑 빨아들일 때마다, 잎이 햇빛을 가득 받으며 제 몸의 면적을 늘릴 때마다 부산한 소리가 났다면 여름의 수목원은 더욱 시끄럽고 요란스러웠을 것이다. 초록색으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계절이 천천히 작별을 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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