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 끝내고 평화 시대 열어야" [광복 80주년-다시 평화]

유은상 기자 2025. 8. 24.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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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물림된 고통 잊히는 슬픔(6) 비핵 평화, 2세들의 희망  

원폭 2세, 가난과 원폭증 유전 탓에 '이중고'
비용문제가 아닌 인권문제로 봐야할 시점
80년 지났지만 가해국 사죄·보상 없어
심진태 합천원폭자료관 관장이 피해자 위패가 모셔져 있는 합천원폭피해자위령각에서 원폭 피해의 실태를 이야기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원폭 80년'이 특별한 것은 단순히 그 숫자의 많음에 있지 않다. 그 의미는 세 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겠다. 

첫째는 80년이 지나면서 당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이가 대부분 세상을 떠나고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피해는 현재 진행형이다. 

둘째,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당시 참혹상과 고통, 후유증은 잊혀가지만 원자폭탄을 사용한 미국이나, 침략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범죄를 일삼아 그 원인을 제공한 일본은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원폭은 핵무기의 위험성과 참혹함으로 교훈을 던졌지만 핵무기와 핵사용 위협은 사라지지 않고 더 발전·심화하고 있다. 오히려 더 많은 국가가 보유하거나 소유를 바라고 있으며, 곳곳에서 전쟁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 핵 사용 위협도 지속하고 있다. 80년을 맞아 역사를 되짚으며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지난 5일 합천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2025 합천비핵평화대회'에서 세계 7개 국가에서 온 원폭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원폭 희생자를 기리며 묵념하고 있다. /유은상 기자

◇원폭 2세 지원 더 늦어지면 안 돼 = 원자폭탄 피해를 '끝나지 않은 형벌'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원자폭탄 피해는 피폭 당사자로 끝나지 않고 2세와 3세로 유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물론 일본 정부도 '유전적 연관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부인하고 있다. 

국가인권위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에 의뢰해 진행한 실태조사를 보면 연관성을 무시하기 어렵다. 원폭 2세들은 일반인보다 백혈병, 골수종, 갑상선암, 위암, 자궁암, 뇌졸중, 우울증, 정신분열증 등이 최소 3∼4배, 많게는 수십 배 높았다. 

원폭 피해자를 위한 법률이 2016년 어렵게 제정됐지만 '원폭 2세 지원'에 대한 내용은 빠져 버렸다. 지난해 9월 '원폭 피해자의 자녀까지'를 포함한 개정 법률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기약없이 표류하고 있다.

"회원들이 죽어가면서도 자식들을 걱정합니다. 그리고 병원비 걱정을 합니다. 자신의 고통은 뒷전입니다. 이게 원폭 피해를 겪는 부모들 마음입니다. 저도 똑같은 마음입니다. 몸이 불편한 자식을 하루라도 먼저 내 손으로 보내고 따라가는 게 바람입니다." 한정순 한국 원폭 2세 환우회 회장의 이 말이 현실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현재 후손회에 등록된 원폭 2세 전국 회원 수는 지난해 11월 말 기준으로 4500여 명이며 질병과 싸우는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원은 1300여 명에 이른다. 

원폭 2세이자 반핵평화·인권 운동가인 김형률 씨가 "원폭 피해자와 그 2세 환우의 삶도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하며 '선지원 후규명'을 규정하는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다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됐지만 달라진 것은 없다.

'과학적으로 입증 안 됐다'는 핑계를 대지만 과학적으로 인정할 기준이 어떤 것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어떤 조사를 인정할 것이며, 또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원폭 1세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원폭 2세도 대부분 60∼70대 나이에 접어들고 있다. 

이 문제를 '과학적 근거'나 비용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인권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피폭자들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이거나 식민 착취 탓에 먹고살 것이 없어 일본으로 갔다가 피해를 봤다. 국가가 힘이 있었다면 당하지 않았을 참상이다. 국가는 국민을 지키지 못했고 직무를 유기했다. 국민 인권과 복리 차원에서 뒤늦게라고 국가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5일 일본 원자폭탄 투하 80주년을 맞아 "2017년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지원 특별법이 시행되며 실질적인 지원 기반이 마련됐으나, 지나간 긴 세월을 생각하면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며 "정부는 원폭의 상흔을 치유하기 위해 계속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은 "원폭 80년이 지나면서 많은 이에게 당시 참상과 아픔은 잊히고 있지만 상처는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대물림되고 있다"며 "이재명 대통령도 의지를 밝혔다. 원폭 2세들에게도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다. 국회는 조속히 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나가사키시 평화공원에 설치된 평화기념상. 원자폭탄 낙하 중심지와 그 북쪽의 언덕 위를 평화공원이 조성돼 있고, 그곳에 설치된 높이 9.7m, 무게 30t의 대형 청동조각상이다. 하늘을 가리키는 오른손은 '원폭의 위협'을, 수평으로 뻗은 왼손은 '평화'를, 살짝 감은 눈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유은상 기자

◇"다시는 이런 일 없어야 한다" = 미국은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전체 피폭자는 약 74만 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23만 명가량이 사망했다. 일본은 8월 15일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아시아 태평양 침략전쟁이 원인이었다. 우리나라 또한 국민 10만여 명이 피폭되고 5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세계 두 번째 피폭국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사과와 보상을 하지 않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원폭 투하에 대해 미국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일본의 아시아 침략전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도 경제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을 면제시키는 근거를 제공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전쟁 침략 책임을 물으려면 미국 원폭 투하 책임에 대한 사죄를 먼저 받아야 한다. 이에 한국 원폭 피해자들과 평화단체는 2026년 미국 뉴욕에서 '원폭국제민중법정'을 개최할 예정이다. 한국 원폭피해자와 미국을 공식적인 소송 당사자로 확정했고, 재판에는 국제법 전문가, 시민 사회단체, 핵 관련 피해자와 관련 인사들이 제삼자 자격으로 참여해 의견을 개진한다. 법정은 심리 결과를 종합해 선고를 내리는데, 판결문은 미국 정부와 NPT(핵확산금지조약) 회의에 제출해 국제사회에 알릴 예정이다.

원폭국제민중법정의 원고로 참여하는 심진태 합천원폭자료관 관장은 "핵무기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그걸 직접 맞아본 사람이 가장 잘 안다. 그러니 죽기 전에 이런 무기가 지구상에 있으면 안 된다고 알려야 한다"며 "피해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가해자 책임을 명확히 하고 사과와 보상을 받아야 한다. 결국 미국이 사죄하고, 먼저 핵무기를 내려놔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문제는 핵무기 보유 국가가 점점 늘어나고 있고, 핵무기 위력이 향상되고 소형화된다는 점이다. 많은 이가 핵무기 폐기를 촉구하고 있지만 보유국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특히 '모든 핵무기의 개발·실험·생산·보유·사용·사용위협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2021년 발효된 핵무기금지조약(TPNW)에는 140여 개국이 동참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러시아, 중국, 이스라엘 등 핵보유국과 한국, 일본 등 미국의 주요 동맹국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아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오히려 우리나라 보수·극우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북한 핵위협을 막으려면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최근 한국을 찾은 멜리사 파크 핵무기폐기국제운동(ICAN) 사무총장은 "세계적으로 전쟁 위기가 고조되는 시기에 한국이 가장 안전해질 길은 세계 대부분 국가와 함께 핵무기를 거부하는 TPNW에 합류하는 길"이라며 "한국이 인류와 지구를 보호하는 주도적 역할을 해주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원폭 피해자들과 평화단체들도 핵 없는 세상, 평화 실현에 힘을 쏟고 있다. 이들은 '원폭투하 100년이 되는 2045년까지 지구의 모든 핵무기가 폐기되도록 할 것'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다. 이 내용은 한국 등 7개국 원폭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지난 5일 합천에 모여 발표한 '세계 비핵평화를 위한 2025 한국 합천선언'에 담겼다.

이남재 합천평화의집 원장은 "핵은 우리와 함께할 문명의 이기가 아니다. 야만의 무기다. 핵으로 핵을 막을 수 없고 다시 재현된다면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난다"며 "두 번 다시 지구촌 모든 생명체를 절멸시키는 야만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원폭 투하, 핵실험 국가들에 반인류, 반생명의 가해 책임을 묻고 사죄를 받아야 한다. 나아가 모든 핵무기는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이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유은상 기자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