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선, 중화요리점의 성장과 쇠퇴

1. 일제강점기 조선 중화요리점 추이와 변화 원인
중화요리점은 근대 조선에서 화교의 생존 전략이자 문화 적응 공간이었다. 19세기 말 개항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이들 음식점은 화교 내부 수요를 충족하는 동시에 조선 사회의 음식문화 일부로 자리잡으며 이질적 문화가 교류하는 장이 되었다. 중화요리 유입 배경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개항 이후 활발해진 한중 인적 교류와 화교 정착에 따른 음식 수요 증가. 둘째, 중화요리가 저렴한 가격 덕분에 조선 서민층에게 대중적 음식으로 수용된 점이다. 초기 화교는 대부분 남성이며 생계 해결에 집중했기 때문에 빵, 만두, 국수 등 값싸고 간편한 음식이 중심이 되었다. 당화소, 계란빵, 국화빵 등을 파는 호떡집은 빠르게 대중적 음식점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총독부는 중화요리점을 호떡점, 중화요리 음식점, 중화요리점으로 분류했다. 호떡점은 가족 단위로 운영되며 소규모 제과류를 판매했고, 중화요리 음식점은 면류 중심, 중화요리점은 고급 연회 공간으로 기능하였다. 중화요리점은 화교 인구 증가에 따라 확산되었다. 인천의 화교 인구는 1883년 54명에서 1900년 2,886명으로 급증했고, 중화요리점 수도 증가하였다. 서울에서는 1910년 기준 50개소가 있었고, 주요 입지는 소공동, 정동 등 도심 지역이었다. 1920년대 이전까지는 화교가 주요 고객층이었으나, 이후 화교 인구 증가와 함께 조선인 고객층도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22년 통계에 따르면, 11개 지역 내 2,224 화교 가구 중 약 30%인 669가구가 음식업에 종사하며, 이는 중화요리점이 화교 경제 활동의 핵심 축임을 보여준다. 초기 중화요리점은 화교 중심이었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대중화되기 시작하였다. 본 장에서는 중화요리점의 도입과 성장, 위축과 쇠퇴 시기로 나누어 변화 추이와 원인을 분석한다.
1.1 중화요리점 도입 및 성장 시기
1) 도입기 (개항기~1924년)
개항 이후 조선과 청 간의 교역 확대와 화교 정착은 중화요리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초기 중화요리는 짜장면이나 탕수육이 아닌, 저렴하고 간편한 빵·만두·국수류가 중심이었다. 특히 호떡은 가격 경쟁력으로 인해 조선 서민층에게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서울은 1876년 개항 후 1889년 이미 '복성면포방', '이태주점'이 존재했으며, 인천도 1906년까지 최소 6개의 중화요리점이 운영되었다. 이는 화교 이주와 함께 중화요리점이 빠르게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화교 인구 증가와 중화요리점 수 증가는 명확히 연동된다. 인천 화교 인구는 1883년 54명에서 1900년 2,886명으로 급증했고, 음식점 수도 1906년 6개소에서 1908년 8개소로 증가했다. 서울의 경우 1910년 기준 중화요리점은 50개소, 주요 도심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화교 인구는 1910년 11,818명에서 1924년 35,661명으로 증가하였다. 중간에 일시적 감소가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상승세였다. 특히 1912년과 1920년에는 각각 전년 대비 31.09%, 29.06%의 급증을 보였다. 중화요리점 수도 동반 증가하였다. 1914년 403개에서 1924년 999개로 약 2.5배 확대되었으며, 1920~1922년 사이에도 빠른 증가세를 보였다. 이는 화교 인구 증가가 음식업 확대의 직접적 요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는 중화요리점이 화교 내부 수요를 기반으로 하면서 조선 사회 내 음식문화로서 자리잡기 시작한 시기였다. 아직 고객층은 화교 중심이었지만, 점진적으로 조선 사회로의 확산 기반을 다졌다.
2) 성장 시기 (1925~1931년)
1925년부터 1931년까지는 조선 내 중화요리점이 본격적으로 확장되며 대중화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성장은 주로 화교 인구의 급증, 일본의 화교 대상 통상 규제,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요 확대 등 복합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특히 1924년 일본이 중국산 직물에 고율의 수입세를 부과하면서 직물업에 종사하던 다수의 화교 상인들이 요식업으로 전환한 것이 중화요리점 수의 급증을 불러왔다.
실제 중화요리점 수는 1924년 999개에서 1925년 1,670개로 약 67% 증가하며 급격한 확산세를 보였고, 이후 1930년까지도 1,000개 이상을 유지하며 전반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 1931년에는 1,056개로 다소 감소하였으나, 이는 여전히 이전 시기와 비교해 높은 수준이었다. 이 같은 양적 팽창은 중화요리가 특정 민족의 음식에서 벗어나 조선 사회 내 대중적 음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화교 인구의 증가는 중화요리점 확장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 1924년 35,661명이었던 화교 인구는 1925년 46,197명으로 약 30% 가까이 증가했고, 1930년에는 67,794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음식 수요의 자연스러운 확대로 이어졌으며, 실제로 1927년 서울에서는 119개의 중화요리점이 조합에 가입되어 있었고, 종로, 을지로, 태평로 등 도심 주요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었다. 이 시기 중화요리점은 서울뿐 아니라 인천, 대구, 군산, 평양, 신의주 등 대도시뿐 아니라 면 단위 지역까지 퍼져나가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통상 정책 변화 역시 중화요리점 확대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24년 일본은 '사치품 수입세'를 도입하여 중국산 직물에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였고, 이는 조선 내 화교의 주요 생업인 직물업을 약화시키거나 아예 퇴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화상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요식업으로 전업하면서, 중화요리점은 화교 사회의 새로운 경제적 기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화요리에 대한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요 확대도 중화요리점 성장의 중요한 동인이었다. 초기에는 화교 사회 내부의 수요에 국한되었던 중화요리점은 점차 외부 고객층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고급 요리점은 연회 및 사교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1921년 제일루에서는 독립운동가들이 군자금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으며, 1925년 아서원에서는 조선공산당 창당대회가 개최되었다. 이처럼 중화요리점은 단순한 식사 공간을 넘어 정치적·사회적 만남의 장소로 기능하며 사회문화적 의미를 확장해 나갔다.
나아가, 중화요리는 점차 문화 콘텐츠로서의 위상도 갖추기 시작했다. 1929년에는 『중화요리 맛의 7천년 역사』라는 요리서가 출간되어 조리법과 문화적 배경을 체계적으로 소개하였으며, 중화요리 강습회도 열려 일반 대중의 접근성을 높였다. 이러한 변화는 중화요리가 단순한 외식 산업을 넘어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서 문화적 플랫폼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도 등장하게 되었으며, 중화요리는 더 이상 화교의 전유물이 아닌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수용되고 소비되는 음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925년부터 1931년까지의 시기는 중화요리점이 양적으로 성장할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대중화되고 다층적인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1.2 중화요리점 위축 및 쇠퇴 시기
1) 중화요리점 위축 시기(1932년~1936년)
1932년부터 1936년까지는 조선 내 중화요리점이 일시적으로 위축되며 불안정한 변동을 보인 시기로, 앞선 성장기와는 상반된 양상이 나타났다. 이 시기 중화요리점 수는 1932년 877개로 급감하였으며, 이는 전년도인 1931년(1,056개) 대비 약 17% 감소한 수치로, 중화요리 운영 환경의 급격한 악화를 반영한다. 이후 1933년에는 991개로 소폭 회복하였으나, 1,000개 선을 회복하지는 못했고, 1934년과 1935년에는 각각 1,266개, 1,334개로 다시 증가세를 보였다. 1936년에는 1,516개로 증가하여 회복 국면에 진입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러한 수치는 1930년의 1,544개에는 미치지 못하며, 중화요리점이 구조적으로 완전히 복원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위축의 배경에는 화교에 대한 배척 운동과 이에 따른 화교 인구의 급감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특히 1927년 조선인에 대한 중국의 박해가 보도된 이후, 민족주의 단체들에 의해 조직된 화교 배척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화교 상점과 주택, 공장, 그리고 중화요리점이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경무국에 따르면 총 702건의 화교 습격 사건이 발생했고, 특히 인천, 경기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등지에서 피해가 집중되었다. 중화요리점 또한 조선인 주거지 인근에 위치한 경우가 많아 직접적인 피해를 입었으며, 주요 고급 요리점들도 일정 기간 영업을 중단하거나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1927년의 배화 사건이 중화요리점 수에 직접적인 큰 타격을 주지는 않았으나,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된 반화교 정서는 실질적인 인구 감소로 이어졌다. 화교 인구는 1930년 67,794명에서 1931년 36,778명으로 약 46% 감소하며, 중화요리점 수의 급감과 맞물려 위축기의 시작을 알렸다. 특히 인천에서 시작된 배화 운동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되며, 중화요리점은 물론 전체 화교 경제 기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1933년 이후 본국으로 피신했던 화교들이 점차 귀환하며 경제 활동을 재개함에 따라 중화요리점 수와 화교 인구는 점진적으로 회복되었다. 1933년에는 중화요리점 수가 991개로 증가하고, 화교 인구도 약 9% 증가한 41,266명을 기록하였다. 이어 1934년에는 요리점 수가 1,266개로 늘었고, 인구 역시 49,334명으로 상승하였다. 이러한 회복세는 1935년(1,334개, 57,639명), 1936년(1,516개, 63,981명)까지 이어졌으며, 5년간 요리점 수는 약 73%, 화교 인구는 약 70%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1932년부터 1936년까지는 외부 정치·사회적 충격에 따른 위축과 점진적인 회복이 반복되며, 중화요리 산업이 구조적 전환을 겪던 과도기적 시기로 평가된다. 이 시기의 불안정성은 단순한 업종의 부침을 넘어 조선 내 화교 사회의 존립 기반과 직결된 문제였으며, 중화요리점은 이러한 변화의 최전선에 놓여 있었다.
2) 중화요리점 쇠퇴 시기(1937년~1945년)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한국 내 중화요리점이 급격히 감소하고 장기간 낮은 수준을 유지한 명확한 쇠퇴기로, 일제 말기의 전시 체제와 사회경제적 혼란이 중화요리점 경영에 전례 없는 타격을 가한 시기였다. 이 시기의 중화요리점 수는 1936년 1,516개에서 1937년 864개로 약 43% 감소하며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 이는 위축기 말기 나타났던 회복세가 단절되고, 본격적인 쇠퇴기로의 전환이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1938년에는 712개로 다시 감소하였고, 1939년 798개, 1940년 815개, 1941년 832개로 소폭 증가하였으나 모두 1,000개 미만에 머물렀다. 1942년에는 1,014개로 일시적으로 1,000개를 넘었으나, 1943년에는 다시 966개로 감소하며 쇠퇴 양상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중화요리점의 급감은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과 직결된다. 전시 체제의 본격화는 물자 통제, 식량 배급, 외식업 운영 제한 등의 형태로 현실화되었고, 화교 경제 활동은 이러한 통제 속에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화교 인구 역시 중화요리점 수의 변화와 유사한 흐름을 보였다. 1937년 화교 인구는 전년 대비 약 35.5% 감소한 41,909명으로, 이는 전쟁 발발과 함께 대규모 탈한이 일어났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후 화교 인구는 꾸준히 증가했다. 1938년에는 48,533명으로 약 15.8% 증가했고, 1939년 51,014명, 1940년 63,976명으로 1936년 수준에 근접하였다. 1941년과 1942년에는 각각 73,274명, 82,661명으로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며, 이 시기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러한 증가의 배경에는 중일전쟁 장기화로 인한 본국 정세 불안과, 조선총독부의 화교 재입국 허가 정책이 있다. 실제로 1938년 6월 이후 귀국 화교들의 재입국이 허용되면서, 조선으로 되돌아온 화교들이 요식업을 재개하는 사례도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요리점 수는 인구 증가만큼 회복되지 않았다. 이는 단순히 화교 인구의 수적 회복만으로는 중화요리점의 확장을 설명할 수 없으며, 외부 요인에 따른 구조적 제약이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전시 동원 체제는 민간 경제 전반에 강한 제약을 가했으며, 외식업 또한 물자 배급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경영 유지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식재료 수급의 어려움, 강제 동원 및 제한적 영업 허가 제도 등은 화교 요식업자들의 활동 반경을 극도로 제한하였다.
결과적으로, 이 시기의 중화요리점 쇠퇴는 단순한 상업적 침체가 아닌 식민지 말기 전시 경제 체제라는 구조적 요인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화교 인구가 회복되었음에도 중화요리점 수가 그에 미치지 못했던 것은 이들이 처한 경영 환경의 악화, 그리고 일제 당국의 식민 통치 강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중화요리점의 전반적인 역사를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는 성장과 위축, 쇠퇴의 뚜렷한 흐름 속에서 그 궤적이 명확히 드러난다. 성장기에는 화교 인구의 급증과 일본의 통상 제한 정책, 조선인과 일본인의 수요 증가가 요식업 확장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 1931년 만보산 사건과 이에 따른 배화 운동은 일시적인 위축을 가져왔으며, 이후 점진적인 회복이 이루어졌지만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전시 경제의 전면화는 다시 한 번 중화요리점을 깊은 침체로 몰아넣었다. 결국 이러한 쇠퇴는 1945년 전쟁이 종결되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며, 중화요리점의 회복은 해방 이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②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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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학술지 '탐라문화 제79호(2025)'에 '일제강점기 조선 중화요리점의 발전과정과 대응전략'라는 제목으로 실은 논문은 [제주의 소리]에 싣기 위해 정리 요약한 것이다.
조양(赵阳, ZHAO YANG)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에서 '연변 조선족 음식문화 변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고, 제주대학교 한국학협동과정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 중화요리점의 발전과정과 대응전략'(『탐라문화』 제79집, 2025), '제주 부동산투자이민제를 통해 이주한 신화교의 사회적 통합과 문화적 적응'(『중국연구』 제101집, 2024), '제주 중화요리점의 형성과 변천'(『제주도연구』 제61집, 2024) 등의 연구논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