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취제 없이 인생의 ‘작은 죽음들’을 감당하라 [.txt]

한겨레 2025. 8. 23.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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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경의 에이징북
연약함도 끌어안아야 온전함 이뤄
‘내 삶에 의미 있나?’는 잘못된 질문
우쭐대려는 자아 데리고 숲으로 간다
“멀리 있는 사물을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보고 누구나 “만물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자각하는 방법을 배우기에 자연만큼 믿을 만한 안내자는 없다. 게티이미지뱅크

내 책장에는 존경하는 저자들을 모셔둔 ‘명예의 전당’이 있다. 나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지금도 삶이 삐걱댈 때 처방전처럼 찾아 읽는 책의 저자들. 그중 한명이 미국의 사회운동가이자 교사, 작가인 파커 제이(J.) 파머다.

세상이 무너져가는 듯했던 시기에 나는 그의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을 읽으며 마음을 달랬다. 절망적 상황에서 우리는 마음이 부서지는 ‘비통한 자’들이 되지만, 수천개의 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지는’ 대신 ‘부서져 열리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도 그 애매함을 끌어안고 열린 마음으로 다른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마음의 습관을 키워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며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던 때 만난 책이다. 이 책에서 파머는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유대교 랍비 주즈야의 말을 통해 설명한다. “신은 내게 ‘왜 너는 모세 같은 사람이 되지 못했느냐?’라고 묻는 게 아니라 ‘왜 너는 주즈야답게 살지 못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단순히 ‘옳다’라는 이유만으로 마음에 없는 소명을 추구하는 것도 자신에 대한 폭력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조차 “내 뒤에서 닫히는 수많은 길”을 통해 삶은 어떤 방향으로 나를 이끈다. 자기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면 그렇게 인생이 들려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경험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주의 깊게 읽어내야 한다는 걸 배웠다.

‘일·창조·돌봄의 영성’을 읽은 뒤에는 “나는 내가 가야 할 곳을, 가면서 배운다”라는 파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행동을 해봐야 안다. 행동은 그 나름의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계획과 무관한 경로로 가서 의외의 결과를 만나거나, 예상을 뛰어넘어 삶의 길을 바꿀 수도 있다.

파머가 70대에 쓴 책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에는 앞서 언급한 책들에 담긴 그의 고민과 성찰이 ‘나이 듦’이라는 주제 아래 응축돼 담겨 있다.

나이 들어서 무엇이 좋은지로 시작하는 책이지만 파머는 나이 듦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살아남아 나이가 들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권이며, 죽음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다. 다만 나이 듦이 “쇠퇴와 무기력이 아니라 발견과 참여의 통로가 될 수 있다”라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현대 생활의 분주함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부터 세대 간의 관계, 다양성, 글쓰기 등 여러 주제를 아우르는 이 책에서 내가 오래 머무른 그의 말은 연약함을 끌어안고서도, 아니 연약함을 끌어안아야 ‘온전함’에 다다를 수 있다는 대목이었다.

그가 말하는 ‘온전함’은 완전함과 다르다. 파머는 “이기적이되 관대한, 악의적이되 동정적인, 비겁하되 용감한, 기만적이되 신뢰할 수 있는 그 모든 모습이 나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온전함이라고 설명한다. “어둠으로 내려앉는 것, 빛 속으로 다시 떠오르는 것 모두가 나 자신”이고 “배반과 충성심, 실패와 성공이 모두 나 자신”임을 인정하고 인간적 연약함을 끌어안아야 온전함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만큼이나 부서진 전체인 타자들을 더 받아들이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연약함 끌어안기가 말처럼 쉽지는 않다. 부끄러움이나 암울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난폭하게 들이치는 감정들을 다 몰아내고 싶지 않던가. 혹여 받아들여도 ‘지금 힘든 만큼 나중에 좋은 일이 오겠지’라는 소망을 품게 되지 않던가. 하지만 파머는 자신의 평온을 난폭하게 쓸어가버리는 “슬픔의 군중”이 들이닥쳐도, 지금의 곤란한 감정이 지나면 다시 행복이 깃들 거라고 기대하는 대신 그러한 감정의 현존이 “자신이 인간이라는 신호”임을 받아들인다. 자신에 대한 절망, 틀어진 우정, 중요한 과제의 실패 등 “인생의 작은 죽음들”을 ‘마취제’ 없이 감당한다.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l 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정하린 옮김, 글항아리(2018)

파머는 언젠가 친구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결점을 털어놓은 뒤 잊을 수 없는 축복 같은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인류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자신의 인간적 조건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면서 그러한 인간적 허약함을 끌어안지 않으면 생존할 수도, 번영할 수도 없다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l 파커 J. 파머 지음, 홍윤주 옮김, 한문화(2019)

나이가 들면서 많은 이들은 곧잘 ‘내 삶에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질문에 시달린다. 이 질문엔 답이 없다. 질문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자의식의 성벽 안에 들어앉은 자아는 자기 인생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녀야 한다고 우기며 자신이 세상에 한 기여를 인정받으려 하지만, 파머에 따르면 “내가 누구에게 도움을 주거나 무엇에 기여하는지는 종종 모르며 알 수도 없다는 것, 이것이 진실”이다.

일·창조·돌봄의 영성 l 파커 J. 파머 지음, 홍병룡 옮김, 아바서원(2013)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내 의도, 그리고 과시하지 않고 온전히 기여하기 위해 나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겠다는 마음뿐”이다. 내 생애 안에 결코 완전하게 성취되지 않을 가치를 따라 살고자 할 때는 “오직 ‘충실함’만이 판단 기준”이다. “내가 무엇으로 누구에게 기여하는지를 정확히 알 길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내 말과 행동이 우쭐대는 자아의 지배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종종 내 고집 센 자아가 우쭐대려는 조짐이 보이면 나는 파머의 조언을 따라 다급하게 숲에 간다. “멀리 있는 사물을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보고 누구나 “만물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자각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이를 배우기에는 파머의 말마따나 자연만큼 믿을 만한 안내자는 없다.

김희경 작가, 전 여성가족부 차관

김희경 작가, 전 여성가족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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