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외교, 21세기 지정학의 새로운 무대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S&P글로벌 수석 애널리스트 2025. 8. 23.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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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gh-Tech Powers]'배터리 전쟁' 저자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고정 칼럼
<24>철도 외교(Railway Diplomacy)


얼핏 보기에 낡은 철도와 첨단 기술경쟁이 불러온 지정학의 세계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철도 산업의 현실은 그 세계와 깊이 맞닿아 있다.

현대 고속철도는 막대한 정부 재정 투입, 시속 450km를 넘어서는 미래형 기술, 빈틈없는 안전 체계와 맞물려 있다. 또 자국의 기술 표준을 해외로 수출해 수십 년간 안정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일부 국가의 능력과도 연결돼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21세기 고속철도(HSR)의 지형도를 그려보고자 한다. 주요 플레이어들과 그들 사이의 긴장 관계를 짚어보고, 이 기술이 세계적으로 확산, 발전해 나갈 가능성을 조망할 것이다.
21세기 지정학 무대인 고속철도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유럽연합(EU) 시민 4명 중 3명은 유럽 주요 도시와 수도를 잇는 빠르고 신뢰할 만한 고속철도망이 구축된다면, 단·중거리 이동 시 비행기 대신 고속열차를 선택하겠다고 답했다. 미국의 경우 예상대로 비율은 다소 낮지만 여전히 52%의 응답자가 도시 간 2~3시간 내 이동이 가능하고, 항공권과 가격이 비슷하다면 500마일 이내 구간에서는 비행기보다 고속철도를 이용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차 여행이 비행기보다 더 편안하고 접근하기 쉬운 이동 수단으로 여겨진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항공 산업은 지난 수십 년간 양 대륙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새로운 인프라와 더 촘촘하고 저렴한 노선망을 구축한 반면 철도망은 중국을 제외하고 발전 속도가 더디거나 오히려 후퇴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전 세계적으로 중·장거리 철도 여행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는 데에는 환경적 요인과 개인의 탄소 발자국을 줄일 수 있는 기회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

국제철도연맹(UIC)은 고속철도를 기존 선로에서는 시속 200km(약 124마일) 이상, 전용 선로에서는 시속 250km(약 155마일) 이상으로 운행하는 철도 시스템으로 정의한다. 전용 선로는 기존 선로보다 매끄럽고 안정적이며, 곡선 반경이 넓고 경사가 완만하게 설계된다. 고속철도는 또한 한층 정교한 열차 운행 관리 시스템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열차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하고, 차량 내 컴퓨터와 정보를 주고받으며, 속도 제한이나 비상 정지를 자동으로 실행한다. 이를 통해 열차는 시속 300km 이상으로 달리면서도 열차 간격을 3~5분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고, 동시에 선로 수용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일본의 신칸센은 60년간 지속적으로 개량된 자동열차제어(ATC) 시스템 덕분에 단 한 건의 치명적인 사고도 발생하지 않았다. 지진 감지 장치는 10초 이내에 열차를 멈추도록 작동한다. 현재 중국의 CTCS-3 시스템은 유럽 방식을 기반으로 베이징-상하이 노선에서 시속 350km 운행을 지원하며, 하루 100편 이상의 열차를 99.9%의 신뢰도로 처리한다.

또 고속철도 차량은 경량화된 첨단 소재에 크게 의존한다. 알루미늄 합금, 탄소섬유 복합재, 고강도 강철 등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열차의 무게를 줄이면서도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한다. 차량을 가볍게 만드는 것은 에너지 절감과 선로 마모 감소에도 핵심적이다. 일반적으로 무게를 10% 줄이면 에너지 소비를 약 7% 절약할 수 있다.
후발주자 中, 오랜 강자 유럽·日…고속철도 주도권 향방은

중국은 고속철도 망의 규모와 일부 최신 기술에서 선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고속철도망은 세계에서 가장 크며, 총 길이는 4만5000 km를 넘어선다. 이에 비해 일본 신칸센의 전체 길이는 약 3000 km에 불과하다. 고속철도망의 촘촘함 측면에서는 중국의 약 두 배에 달하지만 말이다. 중국의 고속철도 성공은 다른 첨단 기술에서 그랬듯, 도입과 변형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일본과 독일로부터 기술을 받아들인 뒤 현지 생산을 정착시키고, 빠른 속도로 거의 완결된 공급망을 구축했다.

이를 통해 중국 제조업체들은 부품 공급자로서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했고, 자체 연구개발을 촉진하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중국 자체 기술로 개발된 '푸싱(復興) CR400' 열차는 현재 상용 운행 중인 열차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빠른 축에 속한다. 또한 상하이에서는 세계 최고 속도를 자랑하는 자기부상열차가 시속 431km(268마일)로 운행되고 있다.

중국의 고속철도 개발은 중국 당국의 더 큰 국가적 목표와 맞물려 있다. 광활한 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망 확충, 국내 경제 성장 촉진, 그리고 일대일로(BRI) 전략 등이 이 목표에 포함된다. 고속철도 수출은 중국뿐 아니라 일본,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경쟁국들에게도 중요한 고부가가치 사업이다. 특히 중국은 일대일로의 일환으로 비용 효율적인 금융 패키지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 경쟁국을 제치고 수주를 따내곤 한다. 실제로 2015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반둥 고속철도 사업에서 일본과 경쟁했을 때도 이러한 방식으로 우위를 점했다.

중국의 제안은 신흥국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중국 고속철도 산업의 역사는 비교적 짧다. 앞서 이 칼럼에서 다룬 항공 산업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성장은 대부분 2008년 이후 이루어졌다. 중국은 고속철도 분야에서 후발주자인 것이다. 게다가 기술 표준 측면에서 이미 유럽연합과 일본 업체들이 주도권을 나눠 가진 상태에서 세계 시장에 진입해야 했다.

일본은 1964년 도쿄와 오사카를 연결하는 세계 최초의 고속철도인 신칸센을 개통했다. 프랑스의 테제베(TGV)는 1981년 운행을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유럽 공급업체들은 ERTMS/ETCS(유럽 열차제어·관리 표준 시스템)를 앞세워 유럽 전역은 물론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중국이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르기 전까지 일본 신칸센 표준은 아시아에서 우위를 차지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 맞서는 견제 세력으로 남아 있다. 인도는 2030년 뭄바이-아메다바드 고속철도 구간에서 신칸센 기술을 도입할 예정이다.

공급업체들 간의 경쟁은 단기적 성과가 아닌 장기적인 주도권 싸움이다. 한 나라가 첫 고속철도를 중국의 CTCS(중국 열차제어시스템)로 건설한다면, 그 후 최소 30~50년 동안은 중국산 열차와 부품, 유지보수에 의존할 가능성이 크다. 유럽의 ETCS나 일본 신칸센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대규모 투자는 정치적 영향력과 소프트파워로 이어진다. 표준을 정하는 쪽은 자국의 브랜드 이미지와 영향력을 퍼뜨릴 뿐 아니라, 철도 유지보수와 관련한 정치적 관계에서 장기간 활용할 수 있는 지렛대를 확보하게 된다.

2028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약 8000마일의 고속철도 노선이 건설될 것으로 예상된다. 태국, 인도, 이집트, 발트 3국에서 진행 중인 사업들이 그 예다. 미국에서도 라스베이거스와 남부 캘리포니아를 연결하는 브라이트라인 웨스트, 휴스턴과 댈러스를 잇는 텍사스 센트럴 노선이 진전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고속철도는 세계적으로 점점 더 각광받으며 전략적 기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어느 나라가 노선을 건설하는가에 따라 수십 년 동안 그 나라의 열차, 신호 체계, 표준, 금융, 운영 모델이 함께 이식된다. 이는 건설국 경제에 상당한 활력을 불어넣을 뿐 아니라, 투자 대상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한층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칼럼에서 표현된 견해와 의견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것이며 소속회사의 것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필자와는 Twitter에서 @LithiumResearch를 팔로우하거나 hitechcolumn@gmail.com으로 연락할 수 있습니다.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S&P글로벌 수석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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