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 끝까지 매달려…붉게 피고 또 피는 백일홍
‘여름꽃’ 배롱나무꽃 탐방

오죽하면 매천 황현(1856~1910)이 이랬으랴. “사람들은 추위 속에서 꽃을 피우는 매화와 국화만 품격이 있다고 칭찬하고 한여름에 꽃을 피우는 백일홍은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안타깝다. 차가울 때 피었다면 매화 이상으로 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엄마야, 꽃 색깔 봐라.”
최미향(58)씨 근처에 모친으로 보이는 이가 없었었으니, “엄마야”는 감탄사다. 충남 서산 문수사. 100년 남짓 지내온 배롱나무가 참 붉다. 최씨의 노란 옷이 빨간 나무 그늘에 섞여 주황색으로 보일 정도. “문수사는 서쪽이 트여 있어요. 지금처럼 해지기 직전이 포인트입니다. 한낮에는 오히려 배롱나무꽃이 탁해 보일 수도 있어요. 느긋하게 오면 감흥이 두 배입니다.” 그런데 꽃이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최씨와 함께 온 김은혜(43)씨가 낌새를 알아챘다. “아, 백일홍은 시즌 종료가 멀었어요. 가을 문턱까지 가요. 어떤 배롱나무는 이미 꽃이 몇 봉오리만 남았는데, 그 상태로 꽤 오래가는 거예요. 100일은 간다고 해서 백일홍이라죠?”
도종환 시인도 뭔가 알아챘나 보다. ‘가만히 들여다보니/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떨어지면 또 새 봉오릴 피워 올려/목백일홍나무는 환한 것이다’(도종환 ‘목백일홍’ 부분)

아. 정말 그랬다. 개심사는 공사 중이었고, 배롱나무 느낌은 달랐다. 키 크기를 멈춘 나무는 대신 옆으로 뻗었다. 가지가 우산 살대처럼 동그랗게 나는데, 개중 유난히 길게 난 것들도 있다. 그리고 낙화유수. 꽃은 연못에 떨어져 둥둥 바람 따라 흘렀다.
배롱나무는 법당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만 큰다. 모양새가 불두(佛頭)다. 붉은색 꽃이 피면 화염문양(火焰文樣)이다. 화염은 불교에서 번뇌와 악귀를 물리치는 힘이자 수행을 상징한다. 이러니 고창 선운사, 구례 화엄사, 밀양 표충사, 순천 선암사·송광사, 영동 반야사 등 사찰에서 좋아하는 나무가 됐다. 잘 살펴보면 충청 이남이다. 배롱나무는 추위를 많이 탄단다.


“최종 목적지는 여수. 백일홍 보러 담양에 들렀어요.”
양애숙(56·경기도 고양)씨 부부는 ‘옆길로 샜다’는 말인데, 여간한 의지로는 쉽지 않다. 그들의 의지는 명옥헌 원림으로 향했다. 이곳 20여 그루의 배롱나무는 어울림의 미덕을 갖추고 있다. 연못과 정자, 동백나무·소나무와 섞여 하나의 세계를 만들었다. 경기도 성남에서 온 10대 홍씨 삼자매는 “얼결에 부모님 따라왔다가 소우주를 감상하고 간다”고 할 정도. 자기 얼굴들이 비치는 연못. 물 위에 뜬 배롱나무꽃을 하나, 둘 세다가 부모님의 부름에 후다닥. 꽃잎이 흔들렸다.

“배롱나무로서는 이 한여름이 아쉽기는 할 걸요.”
서정혜(55·충북 청주)씨 일행은 ‘백일홍 성지 순례’ 중이었다. 명옥헌에서도 본 이들이었다. 이미 충청도 쪽은 훑고 왔단다. 서씨의 말은 앞서 밝힌 120여 년 전 황현의 말과 비슷하다. 여름이라 관심 밖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만큼 중한 여름꽃이라고. 장마와 함께 피어 ‘장마꽃’이라고도 하는 능소화가 폭염에 나풀 떨어질 때, 배롱나무꽃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그리고 늦여름까지 이어진다.
이성복 시인이 ‘그 여름의 끝’에서 그랬던가.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라고. 오늘의 폭염이 언제인 듯, 곧 가을. 백일홍은 여름과 함께 사라진다.
■ 여기, 배롱나무꽃 (가나다순)

● 명재고택(충남 논산) ● 문수사(충남 서산) ● 반야사(충북 영동)
● 병산서원(경북 안동) ● 신원사(충남 공주) ● 죽림재(전남 담양)
● 체화정(경북 안동) ● 표충사(경남 밀양) ● 하목정(대구)
」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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