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며느리·손자 지키려…나치 비위 맞춘 슈트라우스
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바그너 이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작곡가로 평가받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9세기 후반에 태어나 통일국가, 공화제, 두 차례의 세계대전까지 격동의 세월을 몸소 겪었다. [사진 사회평론]](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23/joongangsunday/20250823000256380bbch.jpg)
특별열차 마련해야 할 정도로 오페라 인기
수명이 그리 길지 않던 시절이었으니 그 모든 사건을 다 경험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터. 우리가 아는 음악가 중에는 1864년에 태어나 1949년에 사망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거의 유일하다. 5살부터 작곡을 했던 신동이 85세까지 장수를 누린 경우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다. 사망하기 직전까지 창작을 멈추지 않았으니 현역 기간이 무려 80년에 이른다. 이만하면 고령화 시대의 선구적 롤 모델이 아닐까 싶다.
그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오래도록 큰 영향을 준 음악가는 바로 그의 아버지 프란츠 슈트라우스였다. 뮌헨 궁정 오페라단의 수석 호른 주자이자 뮌헨 왕립 음악원 교수였던 아버지 슈트라우스는 일찌감치 아들의 재능을 발견하고 피아노와 바이올린부터 이론, 관현악 편곡, 작곡, 지휘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 분야를 당대 실력자들에게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 게다가 그의 집에는 어려서 고아가 된 음악가 루드비히 투일레가 가족처럼 지내고 있었다. 매일 같이 그와 함께 음악을 만들고 앙상블 연주했던 경험은 예술을 위한 평생의 자양분이 되었다.
독일 음악계가 각각 브람스와 바그너로 대표되는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로 양분되어 있던 시절. 보수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슈트라우스는 주로 베토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같은 전통적인 거장의 음악을 배우며 자랐고, 첫 작품들의 모델도 자연스럽게 전통을 중시하던 로버트 슈만과 펠릭스 멘델스존의 작품들이 주였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바그너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졌던 슈트라우스는 10살 때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과 ‘탄호이저’를 처음 감상하고, 12살과 13살에 ‘발퀴레’와 ‘지그프리트’,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 바그너의 주요 작품 연주에 직접 참여하면서 점차 그 매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독일 마이닝겐 극장. 당대 최고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러는 슈트라우스를 마이닝겐의 부지휘자로 전격 발탁했다. 슈트라우스는 이곳에서 브람스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사진 사회평론]](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23/joongangsunday/20250823000257716tkir.jpg)
마이닝겐에서 보낸 기간은 3년뿐이지만 이 시간은 작곡가로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인생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이곳에서 그가 누린 또 하나의 행운은 바로 유럽 최고의 유명 인사였던 브람스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 마이닝겐 오케스트라와 많은 활동을 해왔던 브람스는 1885년 자신의 ‘교향곡 4번’을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하여 초연했는데, 이 공연의 준비와 리허설을 도맡아 진행한 사람이 21살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였다. 그는 이 시기에 작곡했던 ‘교향곡 2번’에 대한 첫 평가와 조언을 브람스로부터 직접 받는 영광을 누렸다. 그 스스로 이 시기를 “브람스 숭배”라고 회상할 만큼 브람스의 영향은 지대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바그너의 ‘신독일 양식’으로 작곡을 시작한 시기도 바로 이때다. 바그너의 조카사위이자 열렬한 지지자였던 알렉산더 리터가 마이닝겐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새로 부임해 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유난히 아꼈던 리터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며 새로운 형식인 ‘교향시’를 만들도록 설득했다.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24살에 작곡한 첫 교향시 ‘이탈리아에서’를 시작으로 ‘돈 후안’ ‘죽음과 변용’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영웅의 생애’ 등의 걸작 교향시들을 잇달아 내놓음으로써 30대에 이미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작곡가가 되었다.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 포스터. 1905년 초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사진 사회평론]](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508/23/joongangsunday/20250823000259079opcr.jpg)
슈트라우스 예술 인생의 진짜 위기는 그가 68세가 되던 1933년,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정권 초기만 해도 슈트라우스는 히틀러가 유명한 음악 애호가였기에 예술과 문화를 장려할 거라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 히틀러가 ‘살로메’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을 열렬히 좋아한다는 것을 알아서였을까. 그는 나치당에 가입하기는커녕 나치식 인사도 하지 않았고, 구스타프 말러와 펠릭스 멘델스존 같은 유대인 음악가들의 작품 연주에 대한 금지령을 아예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아킬레스건은 외아들의 아내인 유대인 알리체였다.
며느리와 두 손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는 정권의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었다. 괴벨스가 상의도 없이 그의 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그를 제국음악원 원장으로 임명했을 때 이를 거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작은 시냇물’이란 제목의 관현악 작품을 헌정하기까지 했다. 토스카니니가 나치 정권에 대한 항의 표시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감독을 사임했을 때도 그는 빈자리를 메꿔주며 정권에 우호적인 메시지를 꾸준히 보냈다. 그러나 유대인 친구 슈테판 츠바이크의 대본으로 작곡을 강행한 오페라 ‘슈바이크의 여인’은 단 3회 공연 만에 공연 금지를 당했다.
나치 재판서 무죄 받고 85세로 영면
그의 불행은 계속되었다. 1938년 며느리가 가택연금을 당했고, 슈트라우스는 인맥을 동원해 가까스로 그녀의 안전을 확보한다. 하지만 그녀의 할머니 파울라 노이만을 구하려 체코의 유대인 게토까지 찾아갔으나 결국 실패해 노이만은 다른 친척 25명과 함께 수용소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슈트라우스는 아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그가 집을 비운 사이 아들 내외가 게슈타포에 붙잡혀 감금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고, 그들을 찾아내 간신히 석방시켰지만 이들 부부는 다시 가택연금 신세가 되어야 했다.
전쟁이 끝나자 다른 위험이 찾아왔다. 그의 은행 계좌는 동결되었고 재산은 모두 압류당했다. 무일푼이 된 슈트라우스 부부는 독일을 떠나 스위스 취리히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러나 영국의 평론가 노르만 델 마르의 “인디언 섬머”라는 표현처럼 놀랍게도 그의 말년에 창작열은 더 뜨겁게 타올라, ‘호른 협주곡 2번’을 비롯하여, ‘메타모르포젠’ ‘오보에 협주곡’ ‘클라리넷과 바순을 위한 듀엣 콘체르티노’ 등의 걸작을 쏟아냈다. 1947년 3주간 런던에서 열렸던 공연은 그의 마지막 해외 순회 연주가 되긴 했지만 쪼들리던 노부부의 생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949년 9월 8일 한 해 전 뮌헨에서 열린 나치에 대한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된 슈트라우스는 수면 중 평화롭게 영면에 들었다.
유럽인의 기대수명이 40살 안팎이던 시절, 남들의 두 배를 살았던 슈트라우스. 히틀러 집권 후 그가 겪었던 온갖 고생을 생각하면 오래 산다는 것이 항상 좋은 일만은 아닌 듯싶다. 그래도 그가 마지막까지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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