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약에 빠진 '공무원집' 아들…최무선, 한반도 역사를 바꾸다

2025. 8. 23.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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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세포에서 우주까지
최무선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무기 발명가이자 장군으로, 한국 최초로 화약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사진은 최무선의 표준영정.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 위키백과]
최근 베트남에 한국산 무기인 K-9을 수출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여러 매체에 보도되었다. 과거에는 한때 적국이었던 베트남에까지 무기를 판매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무기의 기술 경쟁력이 세계에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 지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였다.

한국 역사상 무기를 만드는 과학 기술로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면 역시 화약을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개발한 고려 시대의 최무선일 것이다. 최무선은 학교에서도 가르치는 이름이고 매체에서도 자주 소개되는 편인 위인이다. 그런데 그렇게 유명한 인물이면서도 그의 삶을 돌아보면 의외의 놀라운 사실이 여럿 눈에 뜨인다.

우선 최무선은 그 성장 환경부터가 특이하다. 신분제 사회의 옛 시대였으니 최무선이 대대로 기술을 갈고 닦는 장인 집안 출신이라거나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무기를 활발히 사용하는 군인 집안 출신이었다면 어울릴 것이다. 그러나 역사 기록에 그런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오히려 최무선이 광흥창사(廣興倉使)였던 최동순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광흥창은 공무원들의 월급을 저장해 놓는 금고 내지는 창고를 말한다. 그러니 광흥창사라는 사람은 아마도 돈 계산 관련된 일을 가장 많이 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최무선의 아버지는 재무팀 또는 회계팀 직원이었던 셈이다.

이성계, 진포해전 잔당 물리쳐 인기 얻어
최무선의 화약 제조를 그린 민족기록화.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그런 그가 화약이나 무기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된 원인은 아마도 곡식 운반 문제 때문이었을 듯하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세금으로 걷은 곡식을 주로 배에 실어 운반했다. 그런데 고려 말에는 왜구라는 이름으로 전국에 엄청난 숫자의 해적들이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서 해적의 공격 때문에 세금을 안전하게 운반해 오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최무선의 아버지 역시 이 문제 때문에 근심이 많았을 것이고 자연히 최무선도 해적을 물리칠 방법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해외 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 당시 고려는 몽골제국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런 만큼 서해 건너 예성강을 통해 고려의 수도에 드나드는 몽골제국의 상인들도 꽤 있었다. 최무선은 그들과 어울렸다. 『연려실기술』에는 아예 그가 중국말에도 능통했다고 되어 있을 정도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무선은 자연히 해외에서 유행하는 새로운 기술을 가져와서 고려의 해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상상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그는 고려에서는 대량생산이 불가능했던 화약을 직접 만들어 보는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전공이나 배경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좋아하는 일을 찾아 창업이나 기술 개발에 뛰어든 청년과 비슷해 보이는 모습이다. 화약을 만들기 위해 최무선은 여러 가지로 궁리하기도 하고 몽골제국에서 온 상인에게 이런 저런 정보를 입수하기도 하면서 공을 들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꽤 실용적인 화약 생산 방법을 완성한다. 화약 제조법은 당시로서는 최고의 첨단 기술에 속하는 가치 있는 국방 기밀이었는데, 그것을 외국 문화에 관심 많던 어느 회계팀 직원 아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자 고려 조정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감탄하고 환영했을까? 정반대로 당시 사람들은 최무선이 터무니없는 허풍을 부리면서 뭔가 사기를 치려고 한다고 의심했다.

요즘 기술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 자신의 성과를 인정 받아서 그 결과물을 누구인가에게 넘긴 뒤에 손을 씻는 일을 흔히 업계에서 “엑시트(exit)”라고들 부른다. 최무선은 화약 개발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내고도 엑시트는 커녕 그 사실을 확인 받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최무선은 긴 시간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자신의 발명품이 실제로 가치 있고 의미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야 했다. 결국 최무선의 증명이 성공하여 조정에서는 ‘화약국(火藥局)’이라는 기관을 창설해 화약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최무선이 엑시트를 할 수는 없었다. 개발한 화약으로 실제로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는 일까지 맡아 하라는 지시가 최무선에게 내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과학 기술 개발 뿐만 아니라 그 기술로 당장 소비자가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는 일까지 최무선은 고스란히 맡아 해야 했다.

딱히 무기 만드는 장인이 아니었던 최무선이 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최무선은 작심하고 열심히 무기 개발에도 공을 들여서 몇 년 동안 화약국에서 다양한 무기를 만들었다. 실록에는 그가 개발한 무기로 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철탄자(鐵彈子)·주화(走火) 등등이 언급되어 있는데, 육화석포·화포·신포·화통 등은 다양한 크기의 대포를 말하는 것이고, 철탄자는 총알, 주화는 로켓 형태의 무기로 추정되고 있다. 앞뒤 정황을 보면 이러한 무기 중에 상당수는 그 성능도 상당히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최무선이 포상받은 금, 현재 가치로 3억원
경북 영천시 최무선과학관에 전시된 화차 모형. [사진 최무선과학관]
그러면 이제는 최무선이 그 공적을 인정받아 엑시트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최무선이 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그 다음 단계의 임무를 최무선에게 또 내려 준다. 바로 그 무기를 가져 가서 실제로 병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하라고 한 것이다.

성공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힘든 일을 맡게 되는 모습이다. 그저 해 보는 상상일 뿐이지만, 이 무렵 최무선은 자기 집에서 한탄하는 말도 많이 들었을 것 같다. 자식이 어렸을 때 최무선이 작고했다는 나중의 기록을 참조하면 아마 최무선과 그 부인은 나이 차이가 꽤 났을 텐데, 모르긴 해도 부인은 “왜 당신은 아버지처럼 그냥 고이 공무원으로 회계 일이나 하지,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화약 개발을 한다고 나서서 고생만 진탕하고 이제는 전투에 끌려가서 아내를 과부 만들려고 하느냐”고 한탄했을 듯 싶다. 최무선 스스로도 착찹하고 또 굉장히 두렵지 않았을까?

그러나 최무선은 용기를 내어 심덕부 등의 장군과 함께 실전에 나아갔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그가 참여한 고려군은 지금의 군산 인근에서 해적선 500척을 마주쳤다고 한다. 최무선이 대단히 긴장했으리라 생각하는데 전투를 벌여 보니 그가 개발한 화약과 무기의 성능은 훌륭했다. 고려군은 해적을 완파했고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사람 330명을 구조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최무선은 기술 개발과 제품화에 차례로 성공하고 실제 그 제품을 현장에 적용해 경쟁을 물리치고 업계를 장악하는 데에도 성공한 셈이다. 『서애집』에 따르면 당시 많은 전투에 참여해 보았던 정지라는 장군이 이 전투에도 참여했는데 그는 “평생에 수많은 적과 싸워 봤지만 오늘과 같이 통쾌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이것이 역사에서 말하는 진포해전으로 전투 후에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에게 1890g 정도의 금을 상으로 내려 주었다고 한다. 요즘 금시세로 따지자면 2억8000만원 정도의 금액이다.

최무선의 진포해전 이후 육지에 모여 든 해적들은 지금의 남원 인근으로 갔다가 운봉전투에서 이성계의 부대에게 더 크게 패한다. 이것이 이성계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얻은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덕에 이성계는 조선을 세울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최무선 한 사람의 기술이 역사를 크게 바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 초에도 조정에서는 화약과 대포를 아주 중시하여 『동국여지승람』에는 태종 무렵에 이미 크고 작은 대포 1만3500문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조선 태종 시대라면 유럽에서는 잔다르크가 기사들을 이끌고 백년전쟁에서 싸울 시대다. 그러니 조선은 화약 무기에서 상당히 앞서 간 셈인데, 나는 조선 초기에 나라가 안정을 지키며 기틀을 다질 수 있었던 핵심이 바로 최무선의 화약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과학 기술의 중요성을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현대의 우리는 최무선 같은 사람들이 좀 더 많이 나오고 더 잘 일할 수 있도록 함께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 본다. 한 사람이 기술 개발, 실용화와 제품화, 판매와 경영을 모두 다 성공시켜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방식은 최무선 처럼 몇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위인이 있어야만 가능한 방법 아닐까? 여러 주체들이 활발하게 협력하는 가운데 효율적으로 분화된 기술 산업 생태계를 갖추어 열 사람, 백 사람의 최무선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시대를 꿈꾸어 본다.

곽재식 작가·숭실사이버대 교수. 공상과학(SF) 소설가이자 과학자. 과학과 사회·역사·문화를 연결짓는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의 세균 박람회』 등을 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원자력 및 양자공학·화학을 전공, 연세대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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