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이재명 정부 출범 후 첫 방한 국빈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 제2의 도이머이 추진 또 럼 “국책 사업 韓 기업 참여 적극 검토”

“한국은 베트남의 중요한 파트너다. 각종 국책 사업에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것을 적극 검토하겠다.”
한국을 국빈 방문한 베트남 권력 서열 1위 또 럼(Tô Lâm) 공산당 서기장이 8월 11일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양국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원전·고속철도·스마트시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2030년까지 교역 규모를 지금보다 두 배로 늘리기로 했다. 2045년 선진국 도약을 목표로 한 베트남과 공급망 다변화와 신흥 시장 확대를 노리는 한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셈이다. 이재명 정부 출범 67일 만의 첫 외빈이자 국빈으로 방문한 럼 서기장의 방한 배경과 정상회담 성과를 살펴봤다.

베트남, 2045년 선진국 진입 목표
우선 럼 서기장은 베트남 현지에서 ‘제2의 도이머이( ·쇄신)’를 추진하는 인물로 통한다. 도이머이는 베트남 정부가 전쟁으로 황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1986년 도입한 개혁·개방 정책이다. 당시 도이머이 정책을 통해 베트남은 1990년대 연평균6~8%대의 고도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고, 동남아의 대표적 신흥 제조 거점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 도이머이에 버금가는 경제개혁을 통해 베트남을 선진국 반열에 올리겠다는 게 럼 서기장의 계획이다. 구체적으로, 2030년까지 베트남을 중소득 국가로 도약시키고, 건국 100주년인 2045년에는 선진국 반열에 올리겠다는 것이다.
럼 서기장은 이 과정에서 민간 부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3월 18일 현지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베트남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민간경제 발전을 최우선 가치에 둬야 한다”며 민간 부문을 국가 번영의 핵심 동력으로 삼겠다고 밝혔다. 아울러 시장 경제 제도를 완전히 구축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을 육성하며, 노동생산성과 기업 혁신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경제개혁에 대한 그의 의지는 제도와 정책 변화로 실현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5월 4일 베트남 공산당 정치국이 채택한 결의안 제68호다. 이 결의안은 ‘민간 부문을 국가 경제의 중심축’이라고 명시한다. 그간 베트남은 정부 주도의 개혁 경제와 민간 중심의 시장경제가 뒤섞인 구조였는데, 앞으로는 경제정책의 무게추를 민간 부문으로 옮기겠다는 것이다. 베트남 정부는 현재 50% 수준인 민간 부문 국내총생산(GDP) 비중을 2030년 70%까지 끌어올리고, 민간 기업도 94만여 개에서 200만 개까지 늘리겠다는 구상이다.
한·베트남 원전부터 고속철도까지 전방위 협력
럼 서기장이 한국과 협력 강화를 꾀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베트남이 2045년까지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산업 고도화가 필수인데, 한국이 첨단 기술 도입과 인프라 확충을 도울 수 있다. 한국은 누적 투자액(약 920억달러) 기준 베트남 최대 투자국이고, 이미 1만 개가 넘는 제조·인프라·에너지 등의 기업이 현지에 진출해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 대통령과 럼 서기장은 이날 정상회담에서 ‘한·베트남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심화를 위한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양해각서(MOU)를 통해 원전과 고속철도 분야 등 10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두 정상은 공동성명을 통해 “한국 기업의 베트남 신규 투자, 투자 확대를 적극 장려하기로 했다”며 “인공지능(AI)·반도체 등 첨단· 디지털 산업, 인프라 개발, 재생에너지, 스마트시티, 글로벌 가치 사슬을 기반으로 하는 전문 산업단지 조성 등을 우선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국으로서도 새로운 사업 기회 확대를 위해 베트남과 협력 강화가 필요하다. 이날 정상회담 후 열린 만찬 행사에 재계 인사가 총출동한 배경이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겸 SK그룹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노태문 삼성전자 사장 등 베트남 현지에서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는 재계 인사가 참석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미국 출장 일정 탓에 불참했다고 한다.
한국과 베트남의 협력 가능성이 제기되는 주요 사업 중 하나는 원전 프로젝트다. 베트남은 사업비 총 30조원을 투입해 남부 닌투언성에 원전 네 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원래는 2009년 러시아 원전 기업 로사톰과 일본 원자력발전주식회사가 우선협력대상자로 선정돼 원전 건설을 맡기로 했으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전면 중단됐다. 베트남 정부는 지난 2월 이 사업을 재개하기로 했고, 제3의 사업자 선정을 고려 중이다.
베트남의 국가 중장기 전략 과제인 북남 고속철도 건설 사업도 양국이 협력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분야로 꼽힌다. 수도 하노이와 경제 중심지 호찌민을 연결하는 이 고속철도 사업은 총연장 1541㎞, 설계 속도 시속 350㎞ 규모의 대형 국책 사업이다. 총사업비는 90조원이 넘는다. 2035년 완공이 목표다. 완공 시 하노이와 호찌민 간 이동 시간이 기존 30시간에서 5시간까지 줄어들 전망이다. 럼 서기장은 원전과 고속철도 건설 사업과 관련해 “한국 기업의 뛰어난 경쟁력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한국 참여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양국은 희토류 등 전략 광물의채굴·가공·활용 전 단계에 걸친 협력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으며 석유·가스 탐사 및 개발, 태양광·풍력발전 등 재생에너지, 전력망 확충 및 스마트그리드 개발 등 에너지 분야 협력도 강화하기로 했다.
보호무역주의 확산에 양국 교역 규모 두 배 확대키로
미국발(發) 보호무역주의 확산과 글로벌 공급망 재편 흐름도 한국과 베트남의 전략적 공조를 강화하는 요인이다. 대미 수출 비중이 높은 베트남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호 관세 20%를 부과받으면서 경제적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특히 섬유·의류, 전자제품 등 주력 수출품을 베트남에서 생산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해외 기업이 관세 부담을 이유로 투자를 축소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은 한국과 협력을 통해 첨단 제조·인프라 투자 유치를 확대하고, 수출 시장 다변화를 꾀할 필요가 있다. 한국 역시 베트남을 미국·중국 의존도를 완화할 대체 생산 기지이자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시장 진출 거점으로 삼을 수 있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이에 양국은 올해 한·베트남 자유무역협정(FTA) 발효 10주년을 계기로, 교역 규모를 2030년까지 1500억달러(약 209조원)로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지난해 교역 규모(867억달러)의 두 배에 가깝다. 이 대통령은 “(이날 양국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 약 1만 개 사가 베트남의 경제 발전과 양국 상생 협력에 기여하고 있다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며 “베트남 내 우리 기업의 안정적 경제활동을 위한 지속적인 관심을 요청했다” 고 밝혔다.
Plus Point
‘공안통’ 출신 럼 서기장, 어떻게 권력 서열 1위에 올랐나1957년생인 럼 서기장은 베트남 중앙경찰학교와 인민보안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1979년부터 40년 넘게 경찰·공안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온 ‘공안통’이다. 2016년 공안부 장관에 취임해 응우옌 푸 쫑 당시 서기장이 주도한 ‘불타는 용광로’ 반부패 운동에서 핵심 집행 역할을 맡으며 정치적 입지를 굳혔다. 이 캠페인을 통해 수많은 부패 관료를 숙청하며 ‘강력한 내부 단속가’로 이름도 알렸다.
그가 베트남 권력 서열 1위 자리에 오른 것은 2024년 8월의 일이다. 앞서 같은 해 3월 보 반 트엉 국가주석이 재임 1년 만에 부패 의혹으로 사임하자, 두 달 뒤인 5월 그가 주석으로 추대됐다. 이어 7월 19일에는 14년간 권력을 잡았던 쫑 서기장이 서거하면서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를 새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베트남에서 공안 출신이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은 드문 일로, 반부패 기조 유지와 내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한 당 지도부의 선택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럼 서기장은 취임 당시 공안 일색의 경력 탓에 경제 전문성 부족 우려를 샀다. 그러나 최근 대대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하며 외신으로부터 ‘베트남 경제에 새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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