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 이야기- 진주 대동공업] 6부 김삼만과 기공일생(機工一生) (23) 대동그룹을 만든 사람들

knnews 2025. 8. 22.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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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만과 4형제 어려운 환경에 학교 중퇴
인쇄소·철공소서 부지런히 기술력 키워
가족 저력 발휘 공업사 탄생 결정적 역할
형 김천수의 장남 김사옥 공동사장 역임
동생 김만흥·김성민도 회사 성장 큰 힘


김삼만의 7남매 중 4형제는 아버지의 보증사건으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거나 인쇄소, 철공소 등에 취직을 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4형제들에게는 성실함과 신뢰, 근면이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다녔다. 곤란한 환경을 잘 극복한 저력 있는 가족들이었다. 4형제 모두가 대동단결해 대동공업이라는 기업을 탄생시켰다.

◇아버지 김경서

김경서(1883~1951)는 삼천포에서 태어났다. 1898년 15세 때 진주성 내 성내동으로 이사를 왔다. 맨손으로 진주에 와서 부지런함과 검소한 생활로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자녀들은 신학문을 배우도록 진주공립보통학교에 진학을 시킨 분이다.

1922년경 금융조합 이사 때 보증사건으로 전 재산을 잃자 자녀들이 학교에서 중퇴하고 일자리를 찾아 떠나가는 것을 대책없이 지켜 보아야만 했던 한 많은 기억을 가진 분이다.

김삼만과 함께한 서울 구경을 평생 기쁨으로 간직하면서, 아들이 만든 경운기는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장남 김삼천세

장남 김삼천세(三千世, 1903~1955)의 어릴 적 이름은 삼현(三鉉)이다. 일찍 숙부댁으로 양자를 갔기 때문에 김삼만의 기공일생과 관련된 기록은 많지 않다.

아버지의 금융조합 보증으로 가정이 무너졌을 때 남의 집 농사일을 하면서 부모와 동생들을 돌보았다. 장남의 무게를 그대로 간직한 우리 사회의 한 모습을 보여준 분이다. ㈜대동공업사 설립 당시 이사에 등기된 기록도 있다.

◇차남 김천수

김천수(千洙, 1906~1953)는 양자로 간 김삼천세 형을 대신해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하였다.

김천수는 1923년 열여섯에 진주에서 일본인 기타가와(北川)씨가 운영하는 개문사 인쇄소에 근무하였다. 1932년 성실함을 인정받아 인쇄소 사장으로부터 운영권을 물려받아 개문사 인쇄소를 운영하였다.

해방 후 동생 김삼만이 서울에서 철공소를 운영한다고 할 때 김천수는 김삼만에게 동생 만흥이와 성민이가 모두 기계에 전문 기술을 가졌으니 너희 3형제가 힘을 모아 고향인 진주에서 철공소를 차려 운영하라고 제안했다.

김삼만도 진주에서 대동공업 설립할 때 가장 큰 기둥이 되어주신 분이 김천수 형님이었다고 회고했다.

6·25 때는 진주 국민회 회장과 진주 경찰후원회장으로 활동한 이력 때문에 공산군에 의해 수배가 되자 힘든 피란생활도 하는 어려운 과정도 겪었다. 안타깝게도 동생이 설립한 대동공업의 성장을 보지 못하고 1954년 4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대동공업 사장을 역임한 김사옥이 장남이다.
대동공업 창업주 김삼만이 동생 김만흥·김성민과 함께 장남 김상수의 경영수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삼만·김만흥·김성민·김상수./대동35년사/

대동공업 창업주 김삼만이 동생 김만흥·김성민과 함께 장남 김상수의 경영수업을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김삼만·김만흥·김성민·김상수./대동35년사/

◇김천수의 장남 김사옥

김사옥(1931~1981)은 김천수의 장남으로 초기에는 부친이 운영하는 인쇄소에 근무하면서 왕성한 사회활동을 했다.

대동공업의 기업 규모가 커지자 아버지의 권유로 인쇄소를 그만두고 대동공업에 입사를 해 숙부 김삼만을 보필했다. 1966년 진주청년회의소를 설립하였고, 진주 청년실업인회 회장을 지냈다.

1968년 대동공업사 상무, 1971년 학교법인 대동학원의 등기이사, 1972년 자금을 관리하는 재무담당 전무를 지냈다. 김삼만 대동그룹 회장이 1975년 5월에 경영전공 김사옥과 기술전공 김상수를 각각 대동공업(주) 공동사장에 임명했다.

◇김사옥의 이채로운 경력

김사옥은 1971년 12월 17일 실시된 제1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진주 2선거구(본성동, 남성동, 동성동, 대안동, 인사동, 상봉동)에 출마했다. 13명의 후보 중 최다득표로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멘토인 원준옥 한약방 아들인 원종록과 함께 당선됐다.

1975년 5월에는 사회봉사 부문 5·16민족상을 수상했다. 1978년에는 한국씨름협회 회장을 지냈다. 이 협회의 후임이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 출신 허만정의 5남 허완구 승산그룹 회장이다.

진주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진양호에 가면 365 계단으로 만들어진 1년 계단이 있다. 연인들이 함께 오르내리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소망의 계단’으로 알려져 있다. 이 365계단 공사를 김사옥이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진주의 큰 인물로 성장하던 중 안타깝게도 1981년 52세의 일기로 별세하였다.

◇4남 김만흥

김만흥(萬興, 1915~2008)은 김삼만의 바로 아래 동생이다.

진주제일보통학교(진주중안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형 김천수 밑에서 인쇄업을 배웠다.1938년 중국 북경 인근 북지개발주식회사(北支)에서 일을 하다가 1944년 귀국하여 김천수 형과 함께 진주에서 인쇄소 사업을 크게 벌여 나갔다.

대동공업사의 사세가 확장됨에 따라 인쇄소를 정리하고 1968년 2월 대동공업 부사장에 취임했다. 1972년에는 계열사인 한국단조 사장에 취임했다. 김삼만 대동그룹 회장이 별세 후 1975년 9월부터 1995년 3월까지 2대 대동학원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김만흥의 자녀

김만흥의 장녀 김홍남(1948~)은 진주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갔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미국 예일대학교에서 미술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노무현 대통령 정부 때인 2006년 8월부터 2008년 3월까지 제9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지냈다. 최초의 여성 관장이다. 4남 김윤태는 2002년 9월 제4대 대동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5남 김성민

김성민(性玟 1919 ~ 2000)은 1934년 김삼만 형이 구포 총독부 내무국 초량중기사무소 산하 토목건설회사에 소개해 이곳에서 기술을 배우고 익히도록 하였다. 그후 중국 북경에 있는 북지화북교통주식회사(北支 華北交通株式會社)로 옮겨 자동차 수리분야 기술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술력을 배양했다. 10년 남짓 중국 현장에서 근무한 후 해방이 되자 귀국했다.

중국에서 익힌 기술이 대동공업사 창업 때 형 김삼만에게 큰 힘이 됐다. 김삼만 사장과 함께 현장의 기술을 가장 잘 아는 임원이었다. 1973년 5월 대동농기기어주식회사가 설립되자 초대 사장을 했다. 김성민의 딸 김미정 여사의 남편이 하이트 진로그룹 박문덕 회장으로 알려져 있다.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이래호 (국제학박사, 통역·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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