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석수선의 K-디자인 이야기…한글, 디지털 시대에 맞선 자존심

이세영 2025. 8. 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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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석수선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 본인 제공

"I want to learn Hangul too.(나도 한글 배우고 싶다.)"

인터넷 어느 커뮤니티에서 흔히 보이는 댓글이다. K-팝이 흘러나오는 공연장, 세계 각국의 젊은 팬들이 한국어 가사를 따라 부르며, 자막 없이 드라마를 보겠다며 온라인 한국어 수업에 몰린다. 최근 인공지능 프로그램 '챗 GPT-5' 홍보영상에는 외국인이 한국어로 커피 주문을 하는 법을 배우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GPT-5 홍보영상 번역 [유튜브 캡처]

이처럼 '한류'라는 거대한 문화 파도 위에 실린 한글은 이제 더 이상 한국만의 문자가 아니다. 팬덤은 언어적 경계를 가볍게 넘어섰고, 한글은 키보드와 스마트폰 화면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갔다.

한글은 지금 '글로벌 언어'로 성장하는 기회의 한복판에 있지만, 그 이면에서는 새로운 고민도 고개를 든다.

디지털 시대의 속도와 편의성은 문자를 빠르게 퍼뜨리지만, 동시에 원래의 질서를 흔들며 문화적 맥락을 희미하게 만들기도 한다.

과연 한글은 글로벌 소통의 도구로서, 또 민족 정체성의 상징으로서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될까.

훈민정음, 유일무이한 창제의 기록

한글은 세계 문자 중 유례없는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창제자와 창제 원리, 반포 시기가 모두 분명히 기록된 문자는 한글뿐이다. 1443년 세종대왕이 학자들과 창제해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은 "나랏말씀은 백성에게 달라 글로 표현할 수 없으니…"는 서문으로 유명하다.

백성이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도록 만든 문자라는 점에서, 애민 정신이 녹아 있다.

자음은 발음 기관의 형태를 본떴고, 모음은 하늘·땅·사람의 삼재와 음양오행 철학을 반영했다. '쓰기 편한 문자'가 아니라 우주와 철학적 사유가 담긴 설계였다. 세계 언어학계가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문자'라고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한글이 위대한 이유는 과학성에 그치지 않는다. 한글은 한국인의 사고방식, 정서, 가치관을 담아 세대를 이어온 문화적 시공간의 다리이기도 하다. 언어가 문화의 그릇이라면, 문자는 그 언어를 저장하고 계승하는 도구다. 따라서 한글 보존은 문자 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정체성 보존의 문제다.

오늘날 한글은 전례 없이 널리 알려졌다. 세종학당재단 통계에 따르면, 해외 한국어 학습자는 2000년대 초 수천 명에 불과했으나 2023년엔 18만 명을 넘어섰다. BTS 콘서트장에서, 넷플릭스 드라마 댓글 창에서, 유튜브 커뮤니티에서, 한글은 활발히 쓰인다.

문제는 디지털 미디어의 언어문화다. 속도와 자극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문법 준수보다 간편함이 우선된다. 'ㅅㄱ(수고)', 'ㅇㄱㄹㅇ(이거 레알)' 같은 초성 축약, 영어와 한글 혼용의 '킹받네', 로마자 표기 'saranghae' 등은 국내외에서 범용적으로 쓰인다. 원어민에게는 직관적이지만, 외국인 학습자에게는 문법적 구조를 왜곡하고, 발음·음운 규칙을 무시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디지털 공간의 한글 왜곡 사례 모음 이미지 [유튜브 캡처]

결국 이런 사용 방식이 퍼질수록 한글의 고유한 구조와 뉘앙스가 희미해지고, 학습자들이 한국어의 문화적 깊이를 접하기 어렵게 된다. 한글이 세계적으로 널리 쓰이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내용과 맥락이 단순화되거나 변형되는 것은 우려스러운 지점이다.

언어를 잃으면, 문화를 잃는다

사실 디지털 언어 변형은 전 세계적으로 나타난다. 영어권 청소년의 'LOL, BRB', 일본어 사용자의 로마자 전환 방식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어떤 언어는 이 같은 과정에서 힘을 잃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유네스코 보고서에 따르면, 매주 약 두 개 언어가 소멸한다. 언어와 문자의 변화는 단순한 표현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문화적 세계관의 소멸로 이어진다.

그래서 한글의 체계성을 지키는 일은 언어학적 규범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한국인의 문화와 정체성을 보존하는 행위다.

흥미롭게도 위기 해결의 열쇠 역시 디지털 기술이 쥐고 있다. AI 기반 번역기와 음성 인식 시스템은 한글 학습을 보다 쉽게 만들고 있다. 구글 번역, 네이버 파파고, 카카오의 AI 한국어 교육 서비스는 학습자에게 맞춤식 교정을 제공한다. 가상현실(VR)·증강현실(AR)을 통한 몰입형 학습은 외국 학습자가 실제 한국 거리를 걷는 듯한 경험을 하며 한글 간판을 읽을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또 한국 문화콘텐츠 산업과 한글은 디지털에서 결합해 새로운 방향으로 확산하고 있다. 웹툰 속 세련된 타이포그래피, 게임의 한글 UI(사용자 환경), 글로벌 팬이 즐기는 한글 폰트 디자인과 한글 이모티콘까지 한글은 문화와 기술을 매개하는 브랜드가 되고 있다.

한글은 지금 두 갈래 길 위에 서 있다. '쉽고 재미있는 문자'로만 소비되는 가벼움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한국 문화와 철학을 함께 전하는 매개체로 자리할 것인가. 언어 교육의 목표가 단순히 문법 숙지에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어 교육은 반드시 한국적 정서, 가치, 사회적 맥락과 결합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문자는 언제나 문명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로마 문자가 유럽 문명을 확고히 한 것처럼, 한글 또한 한국인의 역사와 정신을 담아왔다. 지금 한류 열풍 속에서 한글은 다시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디지털 혁명은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던져주고 있다. 한글의 체계성과 정체성을 지켜내되, 기술을 최대한 활용해 교육·보급의 길을 넓힌다면, 한글은 우리나라 문자만이 아닌 21세기 세계 문명의 문화 인프라로 자리할 것이다.

우리가 한글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21세기 사람은 한글을 통해 자신의 문화와 세상을 이야기했다."

석수선 디자인전문가

▲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박사(영상예술학 박사). ▲ 연세대학교 디자인센터 아트디렉터 역임. ▲ 현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겸임교수. ▲ 한예종·경희대·한양대 겸임교수 역임. ▲ 디자인 컴퍼니 (주) 카우치 포테이토 대표이사.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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