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첫’] 낯선 ‘님’과의 애착…운명을 바꾸는 날카로운 추억

관리자 2025. 8. 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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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첫’] (4) 첫 키스
감각과 감각이 접점을 확인하는 행위
나를 열어 너를 받아들이는 사건이며
새롭고 낯선 세계에 대한 설렘의 순간
사랑의 격정은 세월 따라 닳아가지만
첫 키스 추억으로 남은 생 밀고 나가
일러스트=이철원

키스는 감각과 감각이 서로 꿈꾸던 접점을 확인하는 행위다. 키스는 너에게 닿는 순간이고 나를 열어 너를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그리하여 키스는 타자라는 상대방을 최초로 체험해서 내면화하는 과정이며, 그 기억은 서로 말하지 않고 관계가 성립됐음을 인정하는 증표로 남는다.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라고 썼다. 그 설레고 말랑말랑하고 달콤해야 할 첫 키스를 날카롭다고 말하는 순간 독자는 심각해진다. 첫 키스를 경험해보지 못했던 열 몇살 때 나는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붙잡고 전전긍긍했다. 그 날카로운 것이 왜 나에게는 오지 않는가, 날카로운 입술의 칼에 베이는 날이 과연 오기는 올 것인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는 열 글자는 지금도 머릿속에서 풀지 못한 숙제처럼 남아 있다. 달콤한 첫 키스라는 말의 상투성을 일시에 잠재우고 나를 긴장시키는 말의 스승처럼. 첫 키스의 추억 앞에 서면 누구나 새가 앉았다가 날아간 나뭇가지처럼 떨린다.

만해는 시집 ‘님의 침묵’의 서문에 해당하는 첫번째 시 ‘군말’에서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라고 쓰면서 님의 의미와 범위를 제시한다. “긔룬 것은 다 님”, 즉 그리운 것은 다 님이라는 말이다. 님의 다의성 때문에 우리는 국어 시간에 만해의 시를 배울 때마다 ‘님’을 해석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님’은 불교적 진리였다가 부처님의 사랑이었다가 빼앗긴 조국이었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도 했다.

‘님’은 그 모든 것을 의미하며 그 모든 곳에 있는 존재이기에 님과의 키스는 날카로울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성적인 욕망에 의해 이뤄지는 키스가 아니다. 낯설고 새로운 세계와의 두근거리는 키스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장 그르니에가 ‘섬’이라는 책에서 말한 비밀을 간직하는 그 순간이 바로 첫 키스의 순간이다.

만해의 시에는 키스나 포옹과 같은 에로티시즘적인 시어가 많이 등장한다. 이를 근거로 에로티시즘이 ‘님의 침묵’의 근저를 이루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타자와 세계를 애착하는 사랑의 충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식의 이해가 선승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만해의 품격을 훼손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첫 키스의 추억이 날카로운 것은 그 키스를 하기까지의 시간이 녹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연한 키스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므로 키스에는 의도가 개입된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전에 골똘하게 준비하는 시간이며, 책임과 도덕의 굴레 안에 자신을 밀어 놓고 고심을 거듭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어찌 달콤할 수 있겠는가.

만해는 첫 키스의 추억이 운명을 바꾸었다고 쓰고, 그 추억이 사라졌다고 썼다. 처음으로 키스한 사람은 ‘님’이 됐지만 님은 사라지고 없다. 다시 만나서 키스할 기약도 없이 이별을 맞이한 것이다. 다시 만나서 키스라는 행위를 공유한다고 해도 그 키스는 무뎌지고 물렁물렁해지고 빛이 바래서 날카로움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첫 키스는 추억으로 남았기에 날카로운 것이다. 사랑의 행위는 반복되면서 낡아간다. 격정과 떨림이 잦아지면서 우리 삶의 모서리는 닳아간다.

첫 키스의 추억으로 우리는 생을 밀고 나간다. 추억 때문에 생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첫 키스가 날카로웠기 때문에 생은 밀고 나갈 법한 것이 된다. 거창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어도 된다. 첫 키스가 세계를 처음 만나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안도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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