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마음을 굳게 먹고
실패할까봐 시작하지 않는다면
느닷없는 천사나 행운도 없으니
일단 시작한다, 그리고 나아간다
존 치버 ‘다리의 천사’(단편선집 ‘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 봐’에 수록, 황보석 옮김, 문학동네)

어쩌면 어머니의 그런 기질을 형이 물려받은 걸까? 하는 의심스러운 일이 생겼다. 형을 집으로 초대했는데 아파트 로비에서 나에게 전화해 아래로 좀 내려오라고 했다. 내 집은 11층이었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땀을 흘리며 형이 비참한 소리로 말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해.” 형과 나 사이에는 언제나 질투의 기미와 자존심 경쟁이 있었다. 연봉이나 서로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그런 대상이 두려워하는 게 겨우 엘리베이터 타기라니. 너무나 우스꽝스러워서 나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 형은 계단으로 걸어 내려갔다. 그 뒤 형의 회사가 새 사무실로 이전을 했는데 52층이었다. 형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어머니와 형이 가진 각각의 두려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느 날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뉴저지의 형 집에 갔다가 뉴욕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차를 몰고 조지 워싱턴 다리를 건너가는데 뇌우와 함께 비가 쏟아졌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리가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형과 어머니 생각이 났다. 뒷자리에 앉은 가족들도. 그 순간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자기방어, “어떤 새롭고 신선한 힘의 근원”에 의지하고 싶어졌다. 마음을 굳게 먹었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깨달았다. 자신에게는 다리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아이를 기숙학교에 데려다주고 혼자 집으로 돌아오게 됐다. 다리를 건너서. 다른 길은 없었다. 내가 다리 한가운데서 숨을 못 쉬고 있을 때 차 문을 열고 한 여자가 올라타며 쾌활하게 말했다. “이렇게 다리 위에서 누가 나를 태워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요.” 그녀는 작은 하프를 들고 있었는데 내가 다리를 건너는 내내 기쁨이 가득한 목소리로 노래들을 불러주었다. 나는 낯선 히치하이커와 함께 다리를 건넜다. 그녀가 천사와도 같은 행운이었다고 느끼면서. 그날도 비합리적인 두려움에 진 나머지 ‘다리 건너가기’를 피했다면 그 자비로운 천사는 만나지 못했겠지.
행운에 “덥석 달려드는 것은 위험한” 일일지 모르나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천사처럼 와주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새 작업을 앞두고 그런 바람이 든다. 첫 장 쓰기에 두려움이 있고, 실패한 소설을 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눌린 채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다면 천사도 없고 수정 가능한 초고도 없이 팔월을 보내버리고 말 테니. 실제로 다리를 건너가 봐야 느끼고 만날 수 있는 게 있을 것이다. 두려워도 제대로 해내고 싶은 일들. 뭔가 하나는 해보며 남은 여름을 보내고 싶다.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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